‘포스트 87’ 길을 묻다
12·3 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권력자 개인의 과오만큼 ‘87년 체제’의 불완전성을 고스란히 노출했다는 평가다.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에 주요 정치인의 의견을 릴레이로 전달한다. 아홉 번째 인터뷰는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이다.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은 7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2·3 비상 계엄을 1997년 외환위기에 비유했다. “IMF 사태 때 30대 기업 중 17개가 문을 닫았다. 다만 그 결과 산업화 시대를 넘어 IT(정보통신) 시대가 열렸다.” 이 전 총장은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도 IMF 직후 이뤄졌다”며 “이제 계엄이라는 ‘정치 IMF’를 딛고 대한민국 재설계 수준의 새로운 정치 질서가 탄생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는 “이번 계엄으로 87년 이후 처음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 개헌 논의는 ‘응원봉 2030세대’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에 중점을 둬야 한다”라고도 했다.
탄핵 집회에서 표출된 국민의 요구는 뭔가.
한마디로 ‘정상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다. 응원봉 집회 깃발에 일자리, 주거, 여가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핵심은 ‘주술의 국가에서 벗어나 내 삶을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민주공화국이 무엇인가. 한자로 풀어보면 ‘공화(共和)’는 함께할 공(共)에 벼(禾)를 먹고(口) 산다는 의미다. 같이 먹고 살자는 거다. 민생이 제일 중요하다. 일자리, 주택, 보육·교육, 건강·의료, 노후 연금, 문화생활, 불평등 극복 이 7가지 문제를 극복하는 나라를 만드는 게 급선무다. 제7공화국은 정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7가지를 보장하는 시대가 돼야 한다.
그 문제를 개헌에 다 담을 수 있나.
정치권이 개헌의 중심에 또 권력구조 논의를 들고 나온다면 국민 동의를 받을 수 없다. 기존 정치권 개헌 논의는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하는 권력구조 논의가 주였다. 사람들은 여기 관심이 없다. 일단은 아직 내란 문제가 정리가 안 됐기 때문에 국민과 더불어 내란을 정리하는 것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악당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이번에 국민이 헌법과 법률 공부를 엄청 많이 했다. 내란 세력 대부분이 사법 처리를 받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도 신병 처리를 앞두고 있다. 대통령이 체포·구속되고 나면 본격적인 국가 재설계로 국면이 전환될 것이다.
불법 계엄을 허용한 국가 시스템부터 바로잡자는 뜻인가.
계엄권을 대통령에게 줄지 말지, 권한대행의 권한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어디까지 용인돼야 하는지, 용산 대통령실 재이전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풀어야 할 과제다. 대통령 거부권의 경우 ‘친인척, 측근 비리’만큼은 거부권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건희 특검 국면에서 계엄이 선포됐듯, 대다수의 역대 대통령이 친인척, 측근 비리로 정권의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실 문제는 총리실을 세종시로 보내고, 총리 공관과 안가, 사무실, 기존 (청와대) 영빈관을 쓰는 방안을 고려할 만하다.
탄핵 후 대선까지(60일) 시간이 짧다. 권력구조 개헌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권력구조 관련해서는 역대 정부와 국회가 돈을 들여 연구를 다 해 놨다. 크게 두 가지 선택의 문제만 남았다. 4년 중임제를 할 것인지 분권형 대통령제를 할 것인지의 문제다. 그리고 선거법 개정 문제다. 결국 국민의 선택인데 개인적으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 미·중·러에 둘러싸인 외교안보 상황을 고려할 때 대통령제 유지가 좋다고 본다. 다만 그간 대통령들이 국회를 경시해서 항상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국회와 어떻게 공존할지 그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는 이해찬 총리가 정말 책임 총리였다. 총리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게 좋다. 적어도 국회에서 복수의 총리 후보를 추천하면 대통령이 선택하는 정도가 중간 합의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일각의 주장대로 결선투표제를 도입해 부통령이 생기면 그 역시 대통령제를 보완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선거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도농복합형 중선거구제를 도입하고 의원 정수를 20~30명만 늘리면 여야 합의가 가능하다. 다만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게 항상 장애였다. 하지만 이번 계엄 해제 때 ‘국회의원은 쓸모있다’는 공감대도 생기지 않았나. 국민이 국회의 필요성을 알게 돼 정리가 빠를 수 있다. 국회 역량 강화를 위해 상임위 경력 8년 이상을 대상으로 상임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 등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 국회의원이라면 대통령에 줄 서는 게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조기대선 국면에서 개헌 국민투표가 가능할까.
이번 계엄은 최순실 국정농단보다 1만 배 심각한 문제다. 국민적 요구가 모인 만큼 대선 후보라면 누구든 개헌 문제를 들고나올 것이다. 이번 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치러야 한다. 여야 정치권에서 합의된 것까지 ‘합의안’을 만들고, 합의가 안 된 것들은 시한을 명시해 부칙에 넣어 찬반 투표에 부치면 된다. 대통령 임기 등 당장 합의가 어려운 문제는 ‘차기 대선 이후 시행’ 같은 부칙을 만들면 합의할 수 있다.
국민의힘이 개헌을, 민주당은 조기대선을 주장하는데.
민주당도 경선 등에서 국민의 선택을 거친다. 민주당 집권이 윤석열 집권과 다르다는 걸 시스템으로 약속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훨씬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 국민의힘은 하루빨리 계엄 세력과 결별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