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게 보면, 태자 세력이 이세민을 제거하려다가 거꾸로 당한 정변(政變)이었다. 만약 이날 그가 먼저 손을 쓰지 않았으면 자신과 식솔들 모두 태자 세력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다. 태자측 계획을 입수한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 등은 치밀한 계책을 마련해 이세민에게 건의했다. 여기엔 태자의 수하였던 ‘현무문 수비 책임자’ 매수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종에 즉위한 후, 이세민은 보복 관행을 자제했다. 패배한 태자의 책사와 수하들을 일률적으로 처형해야 후환이 없다는 조언에 적극 반대했다. 중죄인은 직접 문초하여 죄의 경중을 나눴다.
이번 사자성어는 이인위경(以人爲鏡. 써 이, 사람 인, 할 위, 거울 경)이다. 앞 두 글자 ‘이인’은 글자 그대로 ‘사람으로써’다. ‘위경’은 ‘거울로 삼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라는 의미가 성립한다.
위징(魏徵. 580~643)은 빈곤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수(隋. 581~618)-당 교체기에 지방 세력가의 책사로 활약했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의 눈에 들어 태자 이건성의 책사로 발탁됐다. 하지만 ‘현무문의 변’에서 이건성이 목에 화살을 맞아 죽고, 46세인 그도 취조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하루는 이세민이 위징을 불러 매섭게 문초했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 것이냐?” 위징이 답한다. “만일 이건성 태자께서 제 계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오늘 이런 수모를 당하는 일도 없었겠죠.” 이 돌직구 답변을 듣고 배석한 고관들은 대경실색했다. 위징의 처형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 짧은 답변에서 군계일학 재능과 당당한 기개를 동시에 확인한 이세민은 위징을 사면하고 간관(諫官)에 임명했다. 태평성대로 꼽히는 ‘정관의 치(貞觀之治)’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기존 대신들과 위징의 관계를 조율하는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해결책이 나왔다. 정작 어려운 숙제는 이세민 자신이 매일 겪어야 하는 속앓이였다. 거침없는 직언 앞에서 서운한 마음이나 노기를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경지인가를 자주 실감해야 했다.
특히 난처한 입장이나 감춰진 취지를 위징이 이해해주지 못할 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세민은 끝까지 위징을 내치지 않고 중용한다.
위징이 병에 걸려 향년 63세로 사망하자, 이세민은 몹시 슬퍼하며 상실감을 이렇게 주변에 토로한다. “구리 거울에 비춰보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국가 흥망성쇠를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모자람이나 불찰을 알 수 있소. 위징이 세상을 떠났으니 내가 거울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여전히 쟁쟁한 측근들이 곁에 함께 있어도 이세민은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뭔가 중요한 퍼즐 하나를 잃었다는 그의 상실감은 적중했다. 곁에서 매일 쓴소리를 지겹도록 해주던 위징이 떠나고 이세민의 야망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폭주하기 시작한다. 고구려 침략 등 여러 무모한 정책을 실행하다가 실패를 경험한다. 방현령, 두여회 등 현신(賢臣)도 위징이 하던 간관 역할을 메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세민과 위징의 사례에서 ‘양약이 입에 쓰지만 몸엔 이롭다’는 말에 담긴 지혜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근대화 이전까지, 지금 기준으론 기상천외한 아부들에 중독된 권력자 곁에 머물며 고언(苦言)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은 생사를 초월하지 않고선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인위경. 이 네 글자를 마음 속에 품었기에, 이세민이 ‘천하 명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