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한은은 3년2개월 만에 금리를 낮추는 방향으로 통화 정책을 틀었다. 이후 2회 연속 금리 인하를 단행했는데,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10월~2009년 2월, 6회 인하) 이후 처음이다. 경기 하강 우려가 최근 더 커지면서, 3회 연속 금리 인하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한은은 금리 인하를 일단 멈추기로 결정했다. 미국 기준금리(연 4.25~4.5%)와 격차도 최대 1.5%포인트 차로 유지됐다.
한은이 금리 동결로 통화 정책 방향을 바꾼 것은 불안한 세계 금융시장 환경 때문이다. 예상보다 미국 경기가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달러 가치가 급등하고 미국 국채 금리가 오르는 등 변동성이 확대했다. 특히 지난 10일(현지시간) 발표한 지난달 미국의 비농업 일자리는 전월보다 25만6000명 증가하며, 시장 예상치(15만5000명)를 크게 웃돌았다. 이어 15일 발표한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도 전년 동월 대비 2.9%로, 지난해 11월(2.7%)보다 더 올랐다.
강한 경제 지표에 물가 상승률도 더 오를 조짐을 보이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인하 정책 역시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 올해 두 번 정도의 추가 금리 인하를 예상한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미국의 ‘금리 인하 사이클’은 지난달 끝났고, 오히려 인상으로 기울어졌다”며 전망을 수정했다.
미국이 실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면 현재 1.5%포인트인 한‧미 금리 차는 1.75%포인트 이상으로 더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이 반대로 기준금리 인하를 결정하면 한·미 금리 차를 더 키웠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금리 차가 커지면 최근 1470원대까지 떨어졌던 달러 대비 원화 값도 추가 하락(환율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또 한은은 오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달라질 미국 경제 정책과 28∼29일 열릴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결과, 향후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 여부 등도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금통위는 “향후 국내 정치 상황과 주요국 경제정책의 변화에 따라 경제전망 및 외환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현재의 기준금리 수준을 유지하면서 대내외 여건 변화를 좀 더 점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고 밝혔다.
다만, 부진한 국내 경제 환경을 고려하면 한은이 조만간 기준금리 인하에 다시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11월 한은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9% 낮춰 잡으면서, 1% 때 ‘성장률 쇼크’를 예고했다. 이달 발표한 정부의 올해 경제성장률 예상치(1.8%)와 글로벌 투자은행(IB) 8곳(바클레이스·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씨티·골드만삭스·JP모건·HSBC·노무라·UBS)의 올해 전망치는 평균(1.7%)은 이보다 더 낮다.
고금리 기조가 장기간 이어져 오면서, 위축된 소비 심리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소매판매액 지수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2.1% 감소했다. 카드 대란이 있었던 2003년(-3.1%) 이후 21년 만에 최대 폭 감소다. 여기에 최근의 비상계엄 사태는 소비 위축을 더 심화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그나마 한국 경제를 떠받치던 수출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산업연구원은 트럼프 신정부가 ‘보편 관세’를 부과한다면 한국 수출이 9.3~13.1% 감소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날 금통위도 “지난해 및 금년 성장률은 11월 전망치(24년 2.2%, 25년 1.9%)를 하회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며, 향후 성장 경로에는 국내 정치 상황 변화, 정부의 경기 대응책, 미 신정부의 정책방향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라며 “성장의 하방 리스크가 완화될 수 있도록 기준금리의 추가 인하 시기 및 속도 등을 결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탄핵 정국으로 적극적 재정 정책을 결정할 리더십이 없다는 점도 한은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정책을 당장 쓸 수 없다면, 한은이 먼저 금리를 낮춰 경제의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기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미국이 기준금리 인하를 멈출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에 한은이 일단 시장 상황을 보기 위해 금리 동결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만 경기 하강이 심해지면, 한·미 금리 차를 좁히더라도 원화 가치는 더 하락할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시점에 추가 금리 인하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