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이끌 국방·국무 장관 후보자들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회의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데 대해 현지 전문가들은 “아무리 트럼프라도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에서 합의문에 서명한 후 미소짓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화를 재개할 경우 협상은 '핵동결'을 대가로 대북 제재를 완화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입장에선 핵무기를 가진 북한이 한국을 '패싱'하고 미국과 '직거래' 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될 수도 있다.
국방 “北은 핵보유국가”…국무 “대북정책 살펴야”
논란은 지난 14일(현지시간)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후보자가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하면서 확대됐다. 그가 쓴 용어는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5개 핵보유국(미·중·러·영·프)을 뜻하는 ‘핵무기 국가(nuclear weapon state)’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처럼 핵무기를 실질적으로 가진 것으로 인정되는 나라를 지칭한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 지명자가 14일 청문회를 마친 뒤 기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인선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5일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후보자가 기름을 부었다. 그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는 환상”이라는 민주당 의원의 발언과 관련 “향후 미국의 입장이라고 말하긴 어렵다”면서도 “더 광범위하게 대북정책을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는 (전반적인) 관심(appetite)이 있다”고 답했다.
루비오는 새 대북 정책의 방향과 관련해선 “남북한과 일본,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우발적 전쟁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 무엇을 할지 봐야 한다”며 “각자의 핵무기를 추구하도록 자극하지 않으면서 위기를 막을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대북 전략의 목표가 비핵화가 아닌 미국 본토에 대한 핵위협을 없애는 데 맞춰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16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헤그세스가 사용한 용어는 핵보유국을 지칭하는 말이 맞지만, 아직 미국의 대북 정책의 방향이 공식적으로 변화할 거라고 해석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 지명자가 15일 인사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클링너는 “북한이나 대만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한 발언은 전문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라며 “헤그세스는 외교적으로 북핵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술적으로 표현했어야 했다”고 했다. 미 육군 소령 출신으로 방송 앵커를 지냈던 헤그세스의 비전문성 때문에 발생한 실언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클링너는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법률에도 적시된 정책적 목표이자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기반한 비핵화를 포기할 경우 동맹국과의 관계는 물론 비핵화에 대한 정책적 신뢰도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며 “특히 자체 핵보유를 바라는 인도·태평양 국가들에 대한 암묵적인 핵보유 용인 신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미연합사 작전 참모를 지냈던 데이비드 맥스웰 아태전략센터 부대표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헤그세스가 청문회 준비 전에 한국 문제에 대한 실질적 브리핑을 받았는지 상당한 의심이 간다”며 “현재까지는 (헤그세스 외에) 외교와 북한을 알고 있는 루비오 국무장관, 마이크 월츠 국가안보보좌관, 알렉스 웡 국가안보 부보좌관 등은 북한에 어떠한 유화책도 허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월 '중요군용대차생산공장'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공장 방문에는 김 위원장 딸 주애와 조춘룡 군수공업부장 등 간부들이 함께 동행했다. 공개된 사진에 신형 고체연료 ICBM 화성-18형 이동식 발사대가 보인다. 연합뉴스
그러나 헤그세스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칭한 표현은 질의응답 과정이 아닌, 참모들과 검토를 거쳐 사전에 작성한 서면 답변서에 등장한다. 이 때문에 헤그세스의 발언을 단순히 전문성 부족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 국가정보원은 지난 13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화를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며 “핵동결과 군축 협상 같은 ‘스몰딜(small deal)’이 추진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재선이 불가능한 트럼프가 단기간 내에 비핵화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경우 핵보유를 전제로 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2019년 6월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만나 인사한 뒤 남측 지역으로 이동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연합뉴스
앞서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대선 기간 공개한 정강에서 한반도 정책의 목표에서 '비핵화'라는 표현을 삭제했었다. 북한 역시 트럼프 취임에 앞서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며 미국과 직거래를 하겠다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상태다.
헤그세스의 발언에 대해 물러나는 조 바이든 정부의 존 커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우리는 이를(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recognition)하는 데까지 가지 않았다”면서도 “차기 안보팀이 이를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