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영은 현자였지만 위나라 수도 다량(大梁)의 동문에서 문지기 일을 하며 지냈다. 중국에서 협객은 신변의 위험을 각오하고 약조한 일을 성사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후영의 친구 가운데 힘이 장사였던 주해는 북적이는 시장에서 백정 신분으로 숨어 지냈다.
이번 사자성어는 허좌이대(虛左以待. 빌 허, 왼 좌, 써 이, 기다릴 대)다. 첫 두 글자 ‘허좌’는 ‘왼쪽 자리를 비우다’란 뜻이다. ‘이대’는 여기에서 ‘~한 상태로 기다리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상석인 왼쪽 자리를 비워두고 현자(賢者)를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만들어진다. 마차 진행 방향 기준으로, 좌측은 상석이다. 중국 문화에서 왼쪽은 오른쪽보다 앞 순서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허석이대(虛席以待)’로 자주 쓰인다. ‘허좌이대’는 위무기와 후영의 첫 만남 일화에서 유래했다.
위무기(魏無忌. ? ~기원전 243)는 위나라 제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였기에 제후에 오르지 못했으나 이복형 안리왕(安釐王)이 즉위한 후 신릉군(信陵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위무기는 의협심이 강했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성격도 너그럽고 겸손했다. 이런 그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우대하자 빈객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많을 때는 3000명을 넘기기도 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역사의 한 페이지(page)를 썼다. 막강한 진(秦)나라의 주변 국가 침략을 때론 격퇴하고 때론 억제하는 쉽지 않은 공을 세웠다.
당시 위나라 수도 다량은 중국에서 가장 문화가 앞선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고급 인재들이 늘 넘쳐났다. 다량은 현재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시다.
하루는 신릉군이 마차를 타고 다량 동문에 도착했다. 동문의 문지기 노인이 은자라는 소문이 있어 사람을 보내 빈객으로 초대했으나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귀한 신분을 가진 이가 몸을 낮춰 평민이 머무는 곳을 직접 방문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광경이다.
신릉군이 직접 마차를 몰고 동문에 나타났는데도, 후영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주해와 함께 가야 한다며 마차를 세우더니, 붐비는 시장에 들어가서는 주해와 한담을 나눴다. 신릉군을 오래 기다리게 하여 인내심과 인품을 시험해본 것이다. 집에 후영을 위한 잔치를 열어놓고 적잖은 손님들을 초대한 상태였지만, 신릉군은 당황한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당일 잔치의 주빈을 마차에서 계속 기다렸다. 행인들과 시장 상인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애써 무시했다. 후영과 주해가 신릉군의 빈객이 된 날의 유명한 일화다. 바로 여기에서 ‘허좌이대’가 유래했다.
훗날 신릉군이 조(趙)나라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내야만 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후영과 주해의 진가가 발휘된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해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매형이던 평원군이 원군 요청을 해왔다. 신릉군의 손위 누이도 한단에 머물고 있었다. 만약 조나라가 망하면 진나라의 다음 목표는 위나라가 될 것으로 누구나 예상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신릉군은 후영이 제안한 절묘한 계책을 실행에 옮겨 큰 공을 세운다.
‘사기’의 ‘열전(列傳)’ 가운데 가장 공을 들인 것으로 평가받는 ‘위공자열전’편에서 사마천은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했다. 심지어 사마천은 다량의 동문을 여러 차례 답사하는 열정까지 보였다. 자신을 낮추고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위무기라는 인물에 그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을 느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사마천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관련해, ‘허좌이대’라는 이 말에 더 강한 끌림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귀천에 연연하지 않고 ‘불멸의 저서’ 한 권을 완성하고 말겠다는 사마천의 기세와 열정이 고스란히 투영된 인상적인 페이지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