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향해 “만약 (종전)협상을 하지 않는다면 높은 수준의 세금과 관세, 제재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했던 관세 부과를 무기로 러시아에 종전을 압박한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현지시간 21일 백악관 루즈벨트 룸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런데 트럼프는 이날 러시아에 압박을 가하면서도 “나는 러시아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며 우호적인 태도도 보였다. 전날 유럽연합(EU)을 향해 “미국을 악용하는 중국 못지 않게 나쁘다”며 대부분 동맹인 국가들을 중국에 이은 다음 ‘관세 폭탄’의 타깃으로 지목했던 것과 온도차가 났다.
트럼프는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인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시작되지도 않았을 전쟁을 빨리 끝내자”며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에도 관세를 부과할 뜻을 밝혔다.
그는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는데 쉬운 길이 더 낫다”며 “더 이상 생명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하고, 이제 협상(deal)을 할 시간”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협상의 구체적 방안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경제가 무너지는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매우 큰 호의를 베풀겠다”며 ‘채찍’인 관세와 ‘당근’ 격인 경제적 지원을 함께 고려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양자 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는 특히 “나는 러시아 국민을 사랑하고 푸틴 대통령과는 항상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며 “우리는 러시아가 6000만 명의 목숨을 잃어가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트럼프는 전날만 해도 “푸틴은 잘 못하고 있다. 러시아가 더 크고 잃을 병력도 많지만, 국가는 그렇게 운영하는 게 아니다”며 푸틴을 직접 비판했었다. 이날 트럼프가 꺼낸 유화적 발언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트럼프 특유의 ‘강온전략’으로 해석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트럼프가 취임 당일 “끝내겠다”고 공약했던 사안이다. 그러나 북한이 참전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실제 트럼프는 지난달 시사지 타임과 인터뷰에서 “북한 때문에 종전이 쉽지 않아졌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특히 트럼프가 ‘협상의 만능키’로 여기는 관세는 러시아에는 효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11월까지 미국과 러시아의 무역 규모는 34억 달러(약 4조8900억원) 수준이다. 같은 기간 7000억 달러(약 1006조원)의 교역량을 기록한 캐나다는 트럼프의 ‘25% 관세 부과’ 방침에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물러날 정도의 타격을 입었지만 러시아는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2019년 6월 30일 열린 판문점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야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런 가운데 트럼프가 취임 첫날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한 것도 재차 주목된다. 트럼프는 “나는 김정은과 잘 지냈고, 그도 나의 복귀를 반길 것”이라며 대화 재개 가능성도 시사했다. 북한 역시 관세 전략이 전혀 먹히지 않는 대상이다.
게다가 트럼프가 언급한 핵보유국 인정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사실상 전략적 목표로 삼아왔던 내용이다. 그래서 "만약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한 상태에서 대화가 재개될 경우 대북 협상의 목표는 비핵화가 아닌 핵감축 또는 동결을 전제로 한 제재 완화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한 직후인 22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는 짤막한 보도를 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북한이 관련 소식을 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이 트럼프의 발언에 반응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7일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도 트럼프의 유화적 제스처가 나오자 유엔 주재 러시아 대표부의 드미트리 폴랸스키 차석대사를 통해 “우크라이나 위기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라며 협상의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러시아는 특히 “트럼프는 미국이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를 ‘반(反)러시아’로 만들어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한 일에 대한 책임은 없다”며 “하지만 이 악의적 정책을 끝낼 힘이 트럼프에게 있다”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서 “유럽 동맹국들은 푸틴을 억제할 충분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며 “미국이 없다면 유럽의 그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과 러시아를 옹호하며 사실상 유럽은 유럽 스스로 지키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 우려를 표한 말로 해석된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