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M 불 질러라, 돈 주겠다" 요즘 러시아 노인에 이런 전화 [세계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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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자동 입출금기(ATM)에 신문지를 놓고 그 위에 술을 뿌린 뒤 불을 질러라. 방화 후 영상을 촬영해서 보내면 돈을 주겠다." 
연금생활자로 지내는 러시아인 알렉산더 니키포로프는 지난해 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의 한 ATM 기기에 불을 질러 체포됐다. 체포 뒤 테러 혐의로 기소된 니키포로프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전화 사기꾼이 지시한 것에 따랐을 뿐"이라면서 "사기꾼은 우크라이나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코노미스트,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이처럼 최근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각지에서 노인·학생이 은행 ATM, 쇼핑센터 등을 겨냥해 방화하는 사건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의 경우, 단 열흘 만에 방화사건이 40번이나 벌어졌다. 러시아 독립언론인 미디어조나에 따르면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현재까지 방화 사건은 약 280건 발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진행되는 가운데 2024년 2월 6일 도네츠크 인근에서 지역 주민들과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ATM에서 현금을 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진행되는 가운데 2024년 2월 6일 도네츠크 인근에서 지역 주민들과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ATM에서 현금을 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외신에 따르면 방화범 가운데는 연금 수급자 등 노인이나 돈이 궁한 학생들이 많았다. 방화범들은 "불을 지르면 돈을 주겠다는 전화 사기꾼들에게 우리도 속았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당국은 방화범들을 속인 전화 사기꾼들이 '우크라이나 활동가들'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모국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잘 하는 이중 언어 능통자가 많기 때문에 전화 사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등에는 콜센터 수백 곳이 운영 중이며 콜센터 직원들이 다크넷(인터넷 상의 암시장)에서 러시아인 개인정보 데이터를 사들여 범죄에 활용하고 있다는 게 러시아 측의 주장이다. 러시아인 일부는 "1000달러(약 143만원)를 주겠다"는 말에 속아 방화를 저지르지만, 실제 돈을 받아낸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코노미스트는 "전화 사기범들은 할머니들을 시켜서 러시아 군(軍) 사무실이든 어디든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의 유럽식 표현, 구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에서 유래)'을 던지게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 우크라이나 대원이 소형 투하 폭탄을 만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 우크라이나 대원이 소형 투하 폭탄을 만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밖에 우크라이나의 지령을 받은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국방부 고위 관리와 가족을 폭탄으로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러시아 당국이 최근 밝히기도 했다. 타스에 따르면 지난해 말 우크라이나 당국에 포섭된 러시아인 4명이 선물·보조배터리·문서철 등으로 위장한 폭탄으로 러시아 고위 관리들을 살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친 일도 있다. 통신은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살던 러시아인으로 우크라이나 당국에 포섭된 뒤 러시아로 건너가 테러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에 맞대응 전략을 펴고 있다고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용 차량에 대한 방화 작전을 수행해 지난 1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차량 341대가 방화 사건으로 탔다.  

BBC에 따르면 이밖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군 포로 가족을 협박해 기밀 탈취와 파괴 공작을 강요한 사례도 있다. 우크라이나군 포로 지원본부의 페트로 야첸코에 따르면 포로 가족의 약 50%가 러시아 요원의 접근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포로의 안전을 미끼로 한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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