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에서 세계로, 반도체 미래를 개척하다. 공학부 반도체 디바이스학 과정 창설.”
지난 5일 일본 구마모토(熊本)현 중심지에 있는 구마모토대 캠퍼스.분주히 오가는 학생들 사이로 휘날리는 플래카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4월 일본 최초로 세운 반도체학과 얘기였다. 반도체학과가 들어선 공대 건물 옆엔 ‘클린룸’을 갖춘 산·학 연계 연구개발 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일본 정부가 지원에 나선 곳이다.
이하라 도시히로(井原 敏博) 구마모토대 공대 학장은 “학부에 반도체 교육 조직이 생긴 것은 일본 최초”라며 “대만 TSMC가 오면서 규슈 지역에서만 매년 1000명 이상 반도체 인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 전역에서 온 반도체 전문가들이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구마모토대는 올 4월부터 시작하는 신학기부터는 반도체 대학원 과정도 시작한다. 반도체·정보 수리전공 분야로 모집인원은 박사전기과정(석사과정) 120명, 박사후기과정 22명이다. 이하라 학장은 “올봄 건물이 준공되고 최첨단 기기들이 들어서면 교육 환경이 더욱 정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반도체 학과가 처음으로 설립된 구마모토대. 지난 5일 찾아간 구마모토대 공대 앞에 반도체 학과 과정 설립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김현예 특파원.
일본이 본격적으로 ‘칩(Chip) 전쟁’에 뛰어들면서 첨단 반도체 인력 양성에 나섰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회사인 TSMC의 대규모 일본 투자(공장 건설),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 속에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뭉쳐 세운 라피더스가 출범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인공지능(AI) 산업의 급성장과 더불어 국가 성장 동력이 될 반도체 부활을 위해 ‘전력’ 확보에 나선 것이다. 국가 대항전이나 마찬가지인 반도체 경쟁에서 잃어버린 패권을 되찾기 위해선 인력 양성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1995년만 해도 일본의 반도체 인력은 23만 명 수준에 달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약진 속에 뒤쳐지면서 일본 반도체 인력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2023년 기준 반도체 인력은 약 19만명. 28년 사이 4만명의 ‘전투병’이 사라진 셈이다. 일본 전자정보기술산업협회(JEITA)가 추산한 일본의 부족한 반도체 인력도 향후 10년간 약 4만명이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정부는 일본 전역에 7개 반도체 거점대학을 선정해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문부과학성이 매년 1억 엔(약 9억원)을 지원하고, 반도체 제조 장치를 사용한 실습 교육이 이뤄지도록 할 예정이다. 뒤처진 반도체 설계 분야를 위해 1600억 엔(약 1조5000억원)에 달하는 지원을 하기로 했다.
구마모토대 안에 설치되는 반도체 클린룸. 사진 구마모토대
일본의 절실함은 속도에서 묻어난다. 일본 첫 반도체 학과 개설을 위해 일본 정부는 통상 4~5년이 걸릴 일을 2년만에 끝냈다. 마쓰다 모토히데(松田元秀) 구마모토대 반도체디바이스공학과정 교수는 “통상 학과 과정을 신설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라며 “문부과학성과 경제산업성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빠른 속도로 반도체 학과 과정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구마모토대 반도체 학부 과정에선 후공정인 패키징까지 가르치는데, 설계 부분은 필수 선택 과목으로 지정했다. 구마모토대는 반도체 관련 교원 수도 24명에서 6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학생들에겐 인턴십과 장학금 등도 지원한다. 아오야기 마사히로(青柳昌宏) 구마모토대 촉탁 교수는 “과거 반도체 교육은 기초밖에 가르치지 않았지만, 이제는 실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석사과정까지 마치면 ‘즉시 전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5일 찾아간 구마모토대 공대에는 클린룸 등이 들어갈 연구개발 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김현예 특파원
TSMC도 일본의 반도체 인재 양성에 한몫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구마모토현 제1공장에서 양산을 시작한 데 이어 최근엔 바로 옆에 제2공장 건설에 들어가는 등 무서운 속도로 반도체 인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면서다. TSMC 공장 두 곳에 필요한 인력은 3400명. 약 1조2080억 엔(약 11조원)에 달하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 ‘마중물’에 TSMC의 대형 투자가 잇따르면서, 구마모토엔 60여 곳이 넘는 반도체 관련 기업들까지 모여들어 자연스레 ‘반도체 구인 대란’이 일기 시작했다.
TSMC는 교육에도 직접 나서고 있다. 규슈대 반도체인재육성센터에선 지난해 4월부터 TSMC 기술진이 학생들을 가르친다. 지난해 현장 수업을 들은 대학원생은 약 30명이었다. 약 90분, 총 8회에 걸친 수업은 올 봄에도 이어진다. TSMC 기술진이 최첨단 반도체 제조 프로세스, 디자인 3D(3차원) 패키징 등을 가르치는데, 규슈 지역 8개 제휴 대학원의 학생들도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지금까지 총 200명이 수업을 들었다. 가나야 하루이치(金谷晴一教) 규슈대 교수는 “실제로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고 있는 TSMC 기술자들에게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TSMC는 일본 학생을 고용하고 싶어해 일본어로 수업하지만, 수업 자료는 모두 영어로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대학들도 반도체 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규슈에서 부족한 반도체 인력 1000명을 채울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4월 규슈대 대학원에서 TSMC가 일본에 세운 JASM 기술자가 TSMC의 반도체 기술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규슈대
TSMC가 요코하마(2020년)와 오사카(2022년)에 연달아 디자인센터를 세우는 등 일본과 협력이 단순 반도체 생산 차원을 넘어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와 관련, 중국 반도체 전문가인 야마다 슈헤이(山田周平) 오비린대 대학원 특임교수는 “TSMC가 잇달아 투자하면서 일본 반도체의 회복세가 빨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TSMC는 일본이 제1공장을 예정보다 빨리 완성 시키는 등 다른 나라보다 안정적인 사업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분위기로 인해 TSMC가 제2공장에 이어 제3공장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구마모토=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