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관투자자 2000곳이 고객…의결권 자문사 ISS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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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가 낸 의견을 따르는 것은 편하다. 하지만 그에 반대하려면 수많은 근거가 담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한 재계 관계자가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ISS에 대해 내린 평가다. 민간 기업인 의결권 자문사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의미다. 이들은 기관투자자들이 주총 의결권 행사에 참고하도록 안건 분석 보고서를 낸다. 그중에서도 시초 격인 미국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는 전 세계 의결권 자문 시장의 약 60%를 차지하는 독보적인 존재다. 정기주총을 앞둔 요즘 기업들은 자문사 보고서가 주주 표심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논란도 많다. 무엇보다, 그들이 한국 시장을 잘 알고 자문하느냐는 의구심이 크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불 일으키고 소화기를 파는 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주원 기자
이들의 승승장구 비결은 ‘보고서가 먹힌다’는 데 있다. 기관투자자들이 이들의 자문대로 투표한다. 의결권 자문 산업을 연구하는 총 수(Chong Shu) 미국 유타대 경영대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연구 결과, 글로벌 자문사들은 기업 지분 중 약 20% 정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자문사 의견을 기관투자자들이 기계적으로 따르는, 이른바 ‘로보보팅’(robo-voting)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독립적인 판단을 저해하고, 자문사 권고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삼성물산부터 고려아연까지=한국에서 ISS가 주목받은 계기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다. 당시 ISS는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게 산정됐다며 ‘합병 반대’를 권고했다. 결과적으로 국민연금이 안건에 찬성하면서 합병은 성사됐지만, 당시 삼성물산 외국인 지분율이 헤지펀드 엘리엇(7.12%)을 포함해 33.61%에 달했던 만큼 ISS의 권고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2018년부터 한국에서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서 의결권 자문사 역할은 더 중요해졌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가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업의 경영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유도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이다. 이후 ISS는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KT&G 대표 선임, SK이노베이션·E&S 합병, 두산밥캣·로보틱스 합병, 그리고 최근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까지 굵직한 주총에서 ‘권고’ 형태로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김지윤 기자
◆“한국 전문성 떨어진다” 논란=물론 의결권 자문이 이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자본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수탁자 책임을 수행하는 기관투자자가 전문적인 자문 보고서를 바탕으로 주총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ISS에 대해 제기되는 각종 논란이다. 가장 큰 쟁점은 이해상충 문제다. ISS는 의결권 자문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자회사를 통해 컨설팅 업무도 제공한다. 수많은 컨설팅 고객사를 보유한 ISS가 과연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자본시장 전문가인 김지평 김앤장 변호사는 “한쪽에선 보고서를 내고, 다른 한쪽에선 기업으로부터 컨설팅 비용을 받는 구조 자체만으로 이해상충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투명성 문제도 꾸준히 제기된다. 수 교수는 “ISS와 글래스 루이스는 일반적인 정책 지침을 공개하고 있지만, 실제 권고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불투명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주원 기자
또 이들이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적인 기준만을 적용한다는 비판도 있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예를 들어 한국에서 법적으로 의무사항이 아니거나 별도의 규제를 받지 않는 사안에 대해 글로벌 기준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면 논쟁의 여지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의결권 자문사 성장해야=한국 자본시장에서 ISS·글래스 루이스의 독과점 구조를 해소하고 자문의 수준을 높이려면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이 체급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 상황을 깊이 이해하는 국내 자문사 영향력이 커져야 외국인 투자자도 글로벌 자문사의 일방적인 권고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선 한국ESG연구소(옛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한국ESG기준원(KCGS) 등 3대 자문사가 활발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ISS와 비교하면 경력도 짧고, 영향력도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국내 자문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여 외국인 투자자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김택주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자신의 논문 『의결권 자문회사에 대한 규제방안』을 통해 “한국 의결권 자문 시장의 영세성을 고려할 때 과도한 규제는 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정보공개와 이해상충 관리에 초점을 맞춘 연성 규제는 필요하다고 밝혔다. 우선 의결권 자문 과정에서의 기초 자료와 평가 방법론에 대한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고, 시장 상황에 따라 점진적으로 보완해가는 탄력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ISS 일변도의 의결권 자문 환경에서 벗어나 국내 자본시장에 맞는 자문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취지다.
국내 자본시장 관계자는 “자본시장에서 의결권 자문사는 생존과 직결되는 ‘심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장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돕는 ‘눈’ 역할을 하는 핵심 장기”며 “자문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정보 비대칭이 심화돼 투기성 자본을 견제하기 어려워지는 등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는 ‘기업’입니다. 기업은 시장과 정부의 한계에 도전하고 기술을 혁신하며 인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왔습니다. ‘기업’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더중플이 더 깊게 캐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