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 잠깐 잊고 실컷 웃다가 가시면 현실을 씩씩하게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코미디의 힘인 것 같습니다.”
지난 12일 오후 열린 ‘꽃의 비밀: 관객과의 대화-수다 데이’에서 연극 ‘꽃의 비밀’을 연출한 장진 감독은 이렇게 말하며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꽃의 비밀’은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가부장적인 남편들이 축구를 보러 갔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극이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꽃의 비밀’은 지난달 연극 부문 티켓 판매 1위에 올랐다. 객석 점유율도 90%가량을 유지 중이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은 장진 감독 특유의 코미디가 2025년에도 통한 셈이다.

축구장에 갔다는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모니카(공승연‧가운데)는 남편의 신음 소리에 깜짝 놀란다. “세상에 어느 부부가 서로 전화를 하냐”고 놀린 왕언니 소피아(장영주‧오른쪽)와 술고래 자스민(조연진)도 심싱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이 전화는 자매처럼 지낸 여성 넷이 남장을 하며 좌충우돌하는 소동극의 출발점이 된다. 사진 장차, 파크컴퍼니
이날 공연이 끝난 뒤 바로 열린 ‘수다 데이’에는 200여명의 관객이 공연을 본 이후에도 자리에 남아 장 감독과 최영준 배우로부터 작품에 관한 궁금증과 뒷얘기를 들었다. 최영준은 극 중 보험공단 의사 카를로 역할을 맡았다.
사전에 개설된 이 날 행사 관련 오픈 채팅방에는 관객들의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먼저 배경이 한국이 아닌 이탈리아의 소도시인 이유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장 감독은 해외 진출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해외 관객의 이해와 한국 관객의 이해가 큰 차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 2015년 초연한 ‘꽃의 비밀’은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되며 해외 관객에게도 웃음을 안겼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6명의 인물 중 5명은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 그런데 장 감독은 애초 남자 배우를 염두에 뒀다고 털어놨다. 그는 “여장을 한 남자 배우들이 공연을 시작하다가, 이 배우들이 갑자기 남장을 하는 것이 원래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첫 섭외 전화를 성지루 배우에게 했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다만 주변에서 ‘너무 실험적’이란 평가를 내놔 장 감독의 구상은 구현되지 않았다.
대본에서 애드리브가 차지하는 비중을 묻는 말에 최영준 배우는 “어릴 적 장진 감독님의 희곡집을 사서 본 기억이 있다. 이게 정말 각본에 적힌 대사였을까 궁금했다”며 “그런데 배우들의 말이 대본에도 정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꽃의 비밀’도 애드리브 없이 90%가 대본이다”고 말했다.

장진 감독은 지난 12일 오후 열린 ‘꽃의 비밀: 관객과의 대화-수다데이’에서 ″어려운 시대를 같이 사는 사람들이 제 연극을 보고 잠시 쉴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사진 장차, 파크컴퍼니
이를 들은 장 감독은 “애드리브를 10%나 했어?”라고 되물었다. 장 감독은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자꾸 (애드리브를) 하다 보면 제목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바뀔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영준이 수학적으로 둔해서 그런데, (애드리브가) 10%는 아닐 것”이라고 지적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날 한 관객은 “대본이 너무 좋아 독서 모임에서 연구하고 싶다”며 대본 공유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장 감독은 “대본은 계속 수정 작업 중”이라며 “작가 입장에서는 대본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에 나가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 년 안에 반드시 완성본을 내서 출판과 동시에 다른 분들도 볼 수 있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장 감독은 또 “어려운 시대를 같이 사는 사람들이 제 연극을 보고 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코미디 작품을 올릴 때의 제 심정”이라며 "한국 연극이 여러분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앞서 장 감독은 ‘꽃의 비밀’ 10주년 공연을 앞둔 지난 1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공연 때와 비교하면 세태가 변했다”며 이 작품에 대한 요즘 관객들의 반응을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2025년에도 ‘장진식 유머’에 관객들은 호응했다. 공연 2시간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 1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연극 '꽃의 비밀' 기자간담회에서 장진 감독과 배우들이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북서부 작은 시골 빌라페로사에서 자매처럼 지내는 4명의 여성 앞에 닥친 뜻밖의 사고에서 출발한다. 축구를 보러 함께 떠난 이들의 남편들이 탄 차가 계곡으로 고꾸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다음날은 보험 심사원이 남편들의 단체 생명보험 가입을 심사하기 위해 빌라페로사를 방문하는 날이다. 이에 여성들은 각자의 남편 연기를 해 보험 심사원을 속이기로 뜻을 모았다. 이후 “나는 남자다”를 되뇌는 네 여성의 좌충우돌 소동이 펼쳐진다. 이들의 ‘허술한’ 남장 연기가 폭소를 자아낸다.
왕언니 ‘소피아’ 역은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박선옥‧황정민‧정영주 배우가 맡아 극의 중심을 잡았다. 술고래 ‘자스민’(장영남·이엘·조연진)은 ‘망가진’ 연기로 가장 큰 웃음을 끌어낸다. 예술학교 연기 전공 출신으로 ‘미모’를 담당한 모니카(이연희‧안소희‧공승연)는 남장을 해도 매력을 숨기지 못하며 또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심각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장진식 대사’는 관객을 폭소케 한다. “세상에 어느 부부가 서로 전화를 하냐”와 같이 ‘현실 부부’를 드러내는 대사도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으로부터의 상습적인 폭력과 같은 불행한 가정사가 드러나는 대목은 눈시울을 자극한다.
‘꽃의 비밀’ 10주년 공연은 5월 11일까지 서울 대학로 링크아트센서 벅스홀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