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더니, 이젠 매국노?…보수 재판관도 파묘하는 '극우'

 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경찰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경찰은 이날 헌재 앞 경계 강화와 헌법재판관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당분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경찰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경찰은 이날 헌재 앞 경계 강화와 헌법재판관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당분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막판 뒤집기 했다는데, 파묘가 필요하다
 
지난 5일 한 극우 성향 커뮤니티에서 한 누리꾼이 정형식 헌법재판관을 거론하며 올린 글이다. 헌법재판소가 전날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하자 일부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정형식·조한창·김복형 재판관을 디지털 ‘파묘’ 대상으로 지목했다. 파묘란 특정인의 개인정보나 과거 언동을 캐내 문제를 제기한단 의미로, 무덤을 고쳐 묻기 위해 묘를 판다는 본래 단어에서 유래했다. 앞서 헌재 심리가 진행되던 중엔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 정계선 재판관 등이 일부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 파묘 대상에 올랐다.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정 재판관 등을 파묘 대상으로 지목한 건 헌재가 재판관 전원일치로 윤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정형식·조한창·김복형 재판관은 일부 보수 성향 층에서 한때 ‘보수의 희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보수 또는 중도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이들 재판관 3인이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기각 내지 각하 판단을 내리란 근거 없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이 재판관 전원일치로 내려지자 헌재 자유게시판 등 온라인에선 “매국노들에게 양심이 있기는 한가”라는 등 재판관들을 대상으로 한 비방성 글들이 올라왔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한남동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탄핵 발표 직후 슬퍼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지난 4일 오전 서울 한남동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탄핵 발표 직후 슬퍼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헌재의 탄핵 심리는 약 4개월 만에 마무리됐지만 온라인을 중심으로 불신과 갈등 양상이 이어지고 있다. 재판관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과 좌표 찍기는 물론 재판관들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로 협박성 문자를 보내거나 헌재 청사 및 재판관 자택 앞 등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일각에선 정치권이 이런 양상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4일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한 의원은 “원래 5(인용) 대 3(기각 또는 각하)이 맞았다. 정 재판관이 마지막에 입장을 바꿔 전원 일치 판결로 이어졌다”고 주장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이에 온라인에선 해당 의원 주장을 바탕으로 ‘인용 5명, 기각 3명’이라고 적힌 문 대행 명의의 가짜 대외비 문서가 퍼지기도 했다.


“인용 5명, 기각 3명”이라고 적힌 문 대행 명의의 가짜 대외비 문서가 온라인상에서 유포됐다. 헌법재판소 측은 “해당 문서는 작성된 적 없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캡처

“인용 5명, 기각 3명”이라고 적힌 문 대행 명의의 가짜 대외비 문서가 온라인상에서 유포됐다. 헌법재판소 측은 “해당 문서는 작성된 적 없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캡처

 

"재판관 공통 의견, 통합 추구 의지 담긴 것" 

사법부 내에서도 사법체제 불신에 대한 우려가 크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이번 탄핵 결정문을 살펴보면 재판관의 공통된 의견으로 통합을 추구하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며 “그런데도 일방적인 정치적 관점에 따라 판결을 불복하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재경지법의 다른 판사도 “헌재 결정에 불만이 있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법관 개인을 향한 공격이 디폴트(기본값)가 된 듯한 상황은 염려스럽다”고 지적했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극단적 대립 상황이 파묘나 좌표 찍기 등의 잘못된 행동으로 번지고 있다”며 “시민 스스로 다른 의견을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권 및 사회 각계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민의 의사를 모으는 게 필요하다”며 “소수 의견을 존중하면서 다수를 아우를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