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우리를 지켜줄까' 대만서 고개 드는 미국 회의론

"대만은 필연적으로 중국에 귀속될 것이며, 그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를 막기 위해 자본을 소비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선견지명이 있는 정치가라면 이를 인식하고 중국과 거래를 할 것이다. 대만을 포기하는 대가로, 아프리카와 남극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양보를 얻어내라."

중국군이 타이완 해협에서 실시한 실사격 훈련 구역. Riskintelligence

중국군이 타이완 해협에서 실시한 실사격 훈련 구역. Riskintelligence

지난 2월 미국 국무부 공공외교 담당 차관 대행으로 임명된 대런 비티가 SNS에 적은 글이다. 국방부 정책 부차관으로 임명된 오스틴 다머도 SNS를 통해 "대만이 함락되더라도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안전하고, 번영하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썼다.

미국 고위 관리들의 이런 입장은 대만인들 사이에서 '미국 회의론'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달 24일 일본 닛케이 신문은 자국도 언제든 '버스 밑으로 던져질 수 있다'는 우려가 대만 내에서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계기는 지난 2월 28일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의 안전보장 없는 즉각 휴전'이란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트럼프에게 면박당한 채 백악관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오며 끝나버렸다. 실제 미국은 8일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물자 허브로 통하는 폴란드 접경지역에서 자국 병력을 사실상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2월 2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 The New York Times

지난 2월 2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 The New York Times

트럼프와 젤렌스키 간의 백악관 충돌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직후, 대만 반도체 기업 TSMC는 미국 내 신규 시설에 1000억 달러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지만 대만이 트럼프 행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음이 급해졌다는 신호라는 해석이 많다.


대만은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영토적 야망을 가진 크고 적대적인 이웃 국가를 두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도 대만에 대한 영유권을 정당화하며 대만은 독자적인 문화, 역사, 언어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대만은 우크라이나처럼 미국을 주요 무기 공급원으로 하는 안보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3년 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대만에서는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은 대만"이라는 슬로건이 널리 퍼졌다. 중국의 침공 시 미국이 직접 개입을 자제하고 대만이 홀로 방어해야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과거 트럼프는 대만이 미국 반도체 산업을 '훔쳤다'고 비난하며 방위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반면 대만은 미국으로부터 매년 수십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구매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미국 회의론이 대륙의 중국 공산당 정권이 대만을 상대로 벌이는 인지전(認知戰)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인지전은 적에게 가짜 정보를 주입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도록 함으로써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전술이다. 미국은 위기 상황에서는 대만을 버릴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동맹이라는 주장이 이 인지전의 내용이다. 미국 회의론은 종종 친중 성향의 인사들 사이에서 유포되며, 중국의 허위정보 캠페인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앞선 비티와 다머의 주장은 공직에 임명되기 전 개인적인 의견일 뿐 미 행정부의 입장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인사들이 국무부와 국방부에 포진하고 있다는 건 대만 정부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가 대만에서 미국 회의론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트럼프와 젤렌스키 사이의 논쟁은 백악관의 새 행정부 하에서 공유된 민주적 가치나 인권보다 거래 중개와 권력 정치가 우선시될 것임을 보여준다. 젤렌스키가 트럼프에 맞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 중단이라는 처벌을 받은 것처럼, 대만 역시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비슷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 바이두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 바이두

라이칭더(賴清德) 대만 총통은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와 친분을 쌓기 위해 노골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만 국민이 수십 년 동안 강조해온 민주주의적 가치를 단숨에 버리는 지도자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대만은 2016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선출, 2019년 아시아 최초의 동성결혼 합법화 등 진보적 성과로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2014년  대만의 대학생과 사회운동 세력이 대만의 의회인 입법원(立法院)을 점령한 '해바라기 운동'은 여성과 진보적 세력이 대만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만들었다.

대만이 이런 진보적 정치 가치를 수용한 핵심 동기 중 하나는 국제사회에 가입할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지난 10년간의 성과로 세계 무대에서 새로운 자신감을 얻은 대만이 단지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새롭게 발견한 진보적 정체성을 쉽게 버릴 것 같지는 않다.

대만에는 트럼프가 중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대만을 전폭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트럼프 지지자들도 있다. 이들은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인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공화당원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유포한 주장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대결을 단순한 협상 전술로 해석하려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신화통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신화통신

대만의 미국에 대한 회의론은 냉전 시기의 심리적 트라우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대만인들은 1971년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격을 타이베이에서 베이징으로 바꾼 일에 대해 대만이 버림받은 사건으로 기억한다. 트럼프의 발언과 행동은 이런 불안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은 대만'이라는 말은 우크라이나의 백악관 참사 이후 대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대만이 직면한 위협은 적대적 이웃의 침략뿐만 아니라, 소위 동맹국에 의한 버림받음이기도 하다. 대만에게 최선은 안보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다양한 우군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륙의 강력한 견제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