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MAGA 모자 안썼으면"…日 굴욕? 아베식 전략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건넨 모자를 옆에 던져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로 쓰지 않았으면, 트럼프가 화를 내고 자리를 떴을지도 몰라요.”
일본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난주 아카자와 료세이(赤沢亮正) 일본 경제재생상이 미·일 관세협상에서 취한 행동은 최대한의 ‘방어 전략’이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16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받은 모자를 쓰고 있다. 사진 백안관=지지통신

지난 16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받은 모자를 쓰고 있다. 사진 백안관=지지통신

지난 16일 열린 미·일 관세협상에서,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예상치 못한 두 장면에 직면했다. 백악관 집무실에서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그리고 정면에 앉아 있는 트럼프에게서 선물을 받은 일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대선 슬로건이 적힌 빨간색 모자를 받은 아카자와 경제재생산은, 카메라 앞에서 그 모자를 쓰고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엄지를 들어 보였다.

21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선 이 장면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상징인 모자를 일본 각료가 쓰는 것은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비판에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선물 받은 모자를 바로 써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지난 21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지난 21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AFP=연합뉴스

트럼프·아베 모든 회담 기록 점검

 
트럼프의 2기 정권 출범에 즈음해, 일본 정부가 가장 먼저 점검한 건 아베 신조(安倍晋三)전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 간의 회담 기록이었다. 전화 회담을 포함해 약 40회에 달하는 회담 기록에는, 때때로 트럼프 대통령이 불만스럽게 목소리를 높인 장면도 기록돼 있었다. 아베 전 총리는 “특정 기업의 이름을 언급하며 비난하는 일은 삼가달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언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런 (원색적인)비난을 자제하면, 일본 기업들도 미국에 투자하려 할 것”이라며 달래는 장면도 담겼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는 것이다. 각별히 주의한 것은, 절대 언론 앞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이 모자를 쓴 것도, 이러한 치밀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인지, 16일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제안 없이 기존 주장만 되풀이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안정적으로 다음 협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에도, 일본은 ‘아베 방식’으로 대응하며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게 일본 정부의 평가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첫 협의에서 미국 최고 지도자의 생각을 알 수 있어 매우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2019년 5월 지바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골프장에 함께 나가고 았다.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5월 지바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골프장에 함께 나가고 았다.로이터=연합뉴스

아베식 ‘투자 지도’ 전략 이시바도 본받아

 
아베 전 총리가 트럼프를 상대로 잘 활용한 또 하나의 무기는 ‘투자 지도’였다. 그는 정상회담 때마다 일본에서 챙겨간 미국 국내 지도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여줬다. 지도에는 일본 기업들이 미국 각 주에 투자한 규모와 고용 창출 상황이 수치로 세세하게 표시돼 있었다. “일본은 미국의 넘버원 투자자”라고 어필하고, 정상회담 때마다 “도널드가 대통령이 된 덕에 일본 기업의 투자가 이렇게 늘었다”고 치켜세웠다. 전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는 “아베 전 총리가 ‘잘 보면, 러스트벨트(쇠락한 산업지대) 지역에 대한 투자가 많지 않습니까?’라고 설명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군’이라며 수긍했다”고 회상한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는 아베 전 총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투자 지도 전략’은 그대로 따라 했다.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회담에서, 아베 전 총리처럼 지도를 제시하며 설명했다.  

그러나 이시바 총리는 ‘관세 폭탄’을 피할 수는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미·일 무역마찰이 심했던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자주 만나고, 반복해서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17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미국과의 관세협상 결과를 보고받은 뒤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AP=연합뉴스

지난 17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미국과의 관세협상 결과를 보고받은 뒤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AP=연합뉴스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 

 
일본 정부는 다음 협상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문제 삼고 있는 미국산 쌀 수입 확대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첫 협의에서는 미국이 단기 해결을 바라는지, 아니면 추가 관세 발동 유예 기간인 7월 9일 이후의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즉각 자민당 내부에서는 쌀 수입 확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7월 20일 투개표가 유력시되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핵심 지지층인 농업 관계자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기회에 농업 시장 개방에 나서야 한다”는 경제계와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있어, 장기전이 될 경우 일본의 농업 정책이 전환점을 맞이할 가능성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선거 일정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에도 고심했다. 트럼프 1기 정권 당시인 2019년에도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시기에 미·일 무역협상이 열렸다. 2019년 5월, 일본을 국빈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TV카메라 앞에서 “8월에는 좋은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8월에 협상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에도 합의했다. 사실, 이는 아베 전 총리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뤄진 발언이었다. 성과를 서두르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선거 전엔 일본도 강경한 대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 마치 합의에 도달한 듯한 인상을 주는 기술을 구사했다. 실제로 최종 합의는 9월에 이루어졌다.

2019년 5월 도쿄에서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회담하고 있다.AP= Pool

2019년 5월 도쿄에서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회담하고 있다.AP= Pool

“아베였다면 더 큰 방안 제시했을 것”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2기 정권이었다면 아베 전 총리도 똑같이 관세 폭탄을 맞았을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베 정권 당시 고위 관료는 “아베 전 총리였다면, 예컨대 ‘10년 후를 목표로 방위비 3% 인상을 추진한다’와 같은, 국내에서 설명 가능한 모호한 표현으로 트럼프 대통령도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 언론들의 여러 여론조사에서, 이시바 정권의 관세 협상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0%에 이르는 등, 국민들의 시선은 냉담하다. 각국이 아베 전 총리처럼 ‘트럼프 조종술’을 익힐 수 있을지 여부가 향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