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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431조7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49조3000억원(12.9%) 증가했다. 2019년 221조원 규모였는데 해마다 13~16% 늘면서 5년 새 두배 가까이 불어났다. 인구가 많은 60~70년대생의 은퇴가 본격화하면서 10년 뒤엔 1000조원에 달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제도유형별로 보면 확정급여형(DB)이 49.7%(214.6조원)로 여전히 가장 많았고, 이어 확정기여형ㆍ기업형IRP(DC)이 27.4%(118.4조원), 개인형IRP가 22.9% (98.7조원)를 차지했다.
이처럼 노후 대비용으로 퇴직연금이 주목받고 있지만, 수익률은 여전히 저조하다. 지난해 연간 수익률은 전년 대비 0.5%포인트 하락한 4.77%를 기록했다. DB형보다는 수익성이 좋다는 DCㆍIRP 퇴직연금 가입자도 10명 중 6명(60.6%)이 2~4%의 수익률을 얻는 데 그쳤다. 최근 5년간(2020∼2024년) 평균 수익률은 2.86%로 같은 기간 국민연금 수익률(8.13%)에 훨씬 못 미친다. 해당 기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평균 2.4%인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수익률이 거의 제로인 셈이다.

신재민 기자
퇴직연금 수익률이 저조한 이유는 대부분의 자금이 예금 등 원리금 보장 상품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퇴직연금의 82.6%(356조5000억원)가 원리금보장형으로 운용됐다. 손실이 적은 만큼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긴 어렵다. DC와 IRP를 중심으로 실적배당형 운용비중이 매년 조금씩 늘고 있지만 지난해 기준 17.4%(75조2000억원)에 불과하다. 수익률은 원리금보장형이 3.67%, 실적배당형이 9.96%로 2.7배 차이다.
안정성과 수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으로 떠오르는 게 기금형 퇴직연금이다. 현재는 근로자 개인이 금융회사와 직접 계약을 맺고 투자 상품을 선택하는 ‘계약형’ 방식인데, 이러한 퇴직연금 자산을 하나의 공적 기금 형태로 모아 전문기관이 운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를 골자로 한 퇴직급여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고,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급물살을 타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전문적인 자산 배분과 규모의 경제 효과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일종의 ‘메기 효과’로 금융사 간 경쟁을 촉발해 수수료 인하 등 서비스의 질이 향상될 거란 관측도 있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을 거의 못하고 있는 퇴직연금 제도를 개편하는 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기금형 도입은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을 넘어, 금융사의 이해관계가 아닌 ‘근로자의 노후 소득 보장 강화’라는 본래 목적에 충실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 등에선 퇴직연금 기금화가 수익률 개선으로 이어질 거란 보장은 없다고 반박한다. 기존의 계약형 퇴직연금 수익률이 ‘쥐꼬리’인 이유는 주식ㆍ채권 등 수익성 자산에 분산 투자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지 기금화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기금형과 계약형을 혼용 채택하고 있는 일본과 영국의 경우, 수익률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는 게 금융투자업계의 평가다.
기금 사업자가 고객들을 대거 흡수하면서 금융사의 상품 운용 전략이 뿌리째 흔들리는 등 시장 혼란을 초래할 거란 우려도 나온다. 퇴직연금 업계의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수수료가 낮아 돈 버는 비즈니스가 아님에도 지난 20년간 장기 고객 확보를 위해 투자해 온 측면이 많다”며 “기금 사업자로 고객이 대거 이탈하면 지금껏 인건비나 시스템 개발비 등을 투자해 온 금융사로서는 예측 못 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지난 3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을 위한 전문가 자문단을 공식 출범하고 각계 의견을 수렴 중이다. 정부 관계자는 “퇴직연금을 기금화할 경우 수탁법인(전문기관)을 어떤 형태로 세울지, 주식ㆍ채권 수익률이 하락할 경우에 대비한 안전장치를 어떻게 만들지 등 해외 사례를 포함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며 “근로자의 선택권을 넓히는 차원에서 기금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새정부의 국정 과제 등 정책 방향에 따라 개정안 발의 시기는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