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갔던 ‘그 애니’ 3000원에 본다... 정유미 감독 ‘안경’, ‘파라노이드 키드’

'안경' 속 주인공은 자신이 깨뜨린 안경을 고치기 위해 미지의 집으로 향한다. 검안을 받는 동안 누구나 봤을, 들판 위의 집에 들어가는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게 된다. 사진 매치컷

'안경' 속 주인공은 자신이 깨뜨린 안경을 고치기 위해 미지의 집으로 향한다. 검안을 받는 동안 누구나 봤을, 들판 위의 집에 들어가는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게 된다. 사진 매치컷

한 여자가 깨진 안경을 쓴다. 자신이 밟아 깨뜨린 안경이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으로 들어가 안경을 다시 맞추기로 한다. 정유미(44)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안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올해 열린 제78회 칸영화제에 한국 영화로는 허가영 감독의 ‘첫여름’과 함께 공식 초청된 작품이다.

15분 분량의 단편 애니 ‘안경’은 깨진 안경이라는 사건을 통해 마음 속 자아들과 마주하는 주인공을 그린다. 올해 공개된 정 감독의 또 다른 애니메이션 ‘파라노이드 키드’와 함께 지난 11일 메가박스에서 단독 개봉했다. ‘파라노이드 키드’는 7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정 감독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동명의 그림책을 원작으로 한다. 지난주 열린 제35회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초청돼 처음으로 상영했다.

‘안경’의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 단편 경쟁 부문 초청 소식을 접한 메가박스가 정 감독에게 개봉을 제안했고, 정 감독이 ‘안경’과 비슷한 시기에 작업한 작품 ‘파라노이드 키드’와 함께 상영하는 것을 추천했다. 10일 유선으로 만난 정 감독은 “단편 작품 위주로 작업해서 그동안 영화제를 통해서만 제 작품을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더 많은 분과 만나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정유미 감독은 제78회 칸영화제에서 '안경'으로 비평가주간 단편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한국 애니 최초로 해당 부문에 선정된 작품이다.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은 제78회 칸영화제에서 '안경'으로 비평가주간 단편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한국 애니 최초로 해당 부문에 선정된 작품이다. 사진 매치컷

2006년 ‘나의 작은 인형 상자’로 데뷔한 정 감독은 국민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애니메이션을 배웠다. 2009년 ‘먼지아이’로 칸영화제 감독 주간 단편경쟁부문에 초청됐으며, 2014년 ‘연애놀이’로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작품들은 그림책으로도 출판됐다. 이후 그가 발표한 ‘존재의 집’(2022), ‘파도(2023), ‘서클’(2024) 역시 해외 유수영화제의 단편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 '연애놀이'는 소꿉놀이라는 형식을 차용하여 연애 감정을 탐구한 작품이다. 정 감독은 “상징적인 규칙이나 과거에 했던 놀이 등을 현재의 감정에 비유해보는 걸 좋아한다”며 “익숙한 형식을 통해 내적인 주제를 은유적으로 풀어낼 때 재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 '연애놀이'는 소꿉놀이라는 형식을 차용하여 연애 감정을 탐구한 작품이다. 정 감독은 “상징적인 규칙이나 과거에 했던 놀이 등을 현재의 감정에 비유해보는 걸 좋아한다”며 “익숙한 형식을 통해 내적인 주제를 은유적으로 풀어낼 때 재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사진 매치컷

그가 이제까지 발표한 작품은 모두 얇은 연필로 그려낸 흑백 애니메이션이다. 대사 없이 음악과 음향효과만 들린다. ‘파라노이드 키드’는 그가 처음으로 색을 입히고 내레이션 녹음을 한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늘 제 마음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해 작업한다”며 “최근의 화두는 ‘자기 수용’과 ‘자기 사랑’”이라고 소개했다. ‘안경’과 ‘파라노이드 키드’ 역시 이 주제로부터 시작한 작품이다.


'파라노이드 키드'는 정유미 감독의 동명의 그림책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불안과 자기 혐오라는 감정을 '파라노이드 키드'라는 주인공에 은유했다. 사진 매치컷

'파라노이드 키드'는 정유미 감독의 동명의 그림책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불안과 자기 혐오라는 감정을 '파라노이드 키드'라는 주인공에 은유했다. 사진 매치컷

이번 상영은 ‘파라노이드 키드’로 시작해 ‘안경’으로 끝난다. ‘파라노이드 키드’를 통해 자기 혐오와 불안이라는 감정을 탐색하는 감독의 생각을 직접 듣고, 이후 상영되는 ‘안경’을 통해 상징적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세계를 곱씹어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찾아 헤맸던 따뜻한 포옹을,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 버려진 나에게 해줄 수 있다면..” 감독은 ‘파라노이드 키드’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내레이션은 배두나 배우가 맡았다. 배두나 배우는 그의 팬이었던 정 감독의 제안에 흔쾌히 작업을 수락했다. 그의 목소리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안경’은 패션 브랜드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패션 브랜드 김해김(KIMHĒKIM)의 김인태 디자이너가 파리의 한 극장에서 정 감독의 ‘연애놀이’(2014)를 보고 협업을 요청했다. 정 감독은 광고 형태의 제안이라고 이해했으나, 김 디자이너가 “김해김의 의상을 입은 주인공만 나오면 되니, 감독님의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의견을 줬다. 

정 감독은 김해김의 의상을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에 적극 반영되길 택했다. 작품은 세 챕터로 구성되는데, 각각 털·진주·이불 소재를 사용한 김 디자이너의 옷 세 벌을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정 감독은 “외부 제안으로 시작된 작업이라도, 그 안에서 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면 하는 편”이라며 “앞으로도 책·애니·회화 등 다양한 매체에 따른 작업 방식을 열어두고 있다”고 밝혔다. 22분. 전체관람가. 성인·청소년가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