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낮 12시30분 충남 청양군 남양면 흥산1리 경로당. 구부정한 허리로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와 밀차(유모차 모양의 보행 보조기구)를 밀고 온 할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경로당으로 들어갔다. 이날은 청양군보건의료원(청양의료원) 의사와 간호사들이 직접 마을로 찾아가 주민을 진료하는 날로 이번엔 흥산1리가 대상이었다. 며칠 전부터 마을방송을 통해 진료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일찌감치 농사일을 마치고 경로당으로 발길을 옮겼다고 한다.

10평 남짓한 경로당은 작은 병원이 됐다. 거실은 접수와 문진, 큰방은 한방진료, 작은 방은 주사와 수액을 맞는 장소로 변했다. 공간이 부족해 주방에도 3명이 누울 수 있는 매트가 설치됐다. 진료에는 청양의료원 의사는 물론 인근 보건진료소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모두 참여했다. 경로당에 들어선 주민들은 우선 번호표를 받은 뒤 순서대로 접수했다. 주민들은 청양의료원을 방문했을 때처럼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평소 복용하는 약과 현재 몸 상태를 설명했다. 혈압약과 당뇨약 등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여야 하는 약을 빼놓았다고 하자 의료진은 “그럼 큰일이 난다. 지난번에 처방해준 약은 얼마나 남았느냐”고 꼼꼼하게 확인했다.

접수를 마친 주민들은 바로 뒤편 김상경 청양의료원장에게서 진료를 받았다. 김 원장은 주민들이 평소 앓고 있는 지병의 진행 상황과 새로운 증상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른 병원에서의 진료와 처방약 여부도 중요한 점검 대상이었다. 김 원장은 “어르신들이 여러 병원에서 받은 약을 동시에 먹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위험하다”며 “단순한 현장 진료가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과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옆집 친구와 함께 경로당을 찾은 현기순(81) 할머니는 “아유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어. (한의사) 선생님 침이 용하다고 해서 왔지”라며 혈압측정기에 팔을 올렸다. 의료진은 할머니가 혈압과 당뇨 증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주의사항을 당부한 뒤 약을 처방했다. 김영순(77) 할머니는 “허리(아픈지가)가 오래됐어.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병원에 가기 그렇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청양의료원 소속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김진욱(한방과) 선생은 “허리에 약침을 맞고 물리치료도 하고 수액도 맞고 가시라”고 처방했다. 청양의료원에 2년 3개월 근무한 김진욱 선생은 “다들 어머니 같으신데 병원도 자주 못 오시는 상황이라 순회 진료 때마다 참여하고 있다”며 “고령의 어르신들은 병이 더는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공중보건의를 마칠 때까지 청양의료원에서 근무할 생각이다.


이날 진료는 오후 3시쯤 모두 끝났다. 경로당을 찾은 흥산1리 주민은 모두 31명. 대부분 70~80대 고령의 노인들이다. 흥산1리 문재춘(67) 이장은 “청양에 138개 마을(里)이 있는데 2년에 한 번꼴로 찾아가는 의료원이 방문한다”며 “읍내에 나가기 어려운 주민들은 오늘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말했다. 문 이장은 진료가 시작되기 전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자신의 차를 몰고 직접 집까지 찾아가 경로당까지 모시고 왔다.

경로당 진료는 끝이 났지만 김진욱 선생과 이정순 지역의료팀장(왕진보건진료소장 겸직)은 간호사 2명과 함께 인근 주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동이 어려워 방문진료를 신청한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70대 후반의 남성은 다리와 발가락의 상처가 심각했다. 아내는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119를 타고 응급실로 가자”는 의료진의 제안에 남성은 손사래를 쳤다. 오가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이정순 팀장이 남성의 응급 치료를 맡았고 김진욱 선생은 침으로 아주머니를 치료했다. 이들의 방문이 아니었다면 상처가 더욱 깊어질 수 있던 상황이었다.

충남 청양군은 병원에 가기 어려운 시골마을 주민을 위해 ‘찾아가는 의료원’ 사업을 진행 중이다. 농번기인 봄과 가을, 몸이 아파도 농사일 때문에 병원 방문을 미루고 있는 주민을 위한 현장 진료 서비스다.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다는 게 이 사업의 가장 큰 취지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진료와 처방은 모두 무료다.

청양보건의료원 이정순 지역의료팀장은 “청양은 다른 지역보다 고령화 정도가 심각하고 속도도 빠르다”며 “찾아가는 의료원을 비롯해 원격진료 등이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정부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찾아가는 의료원은 매달 평일 4회, 주말 2회 등 6차례에 걸쳐 청양군 마을을 방문한다. 올해는 60차례가 예정돼 있다. 지난달 24일 청양군 청남면 내직1리를 찾았을 때는 17가구 35명의 주민 대부분이 진료를 받았다. 마을 특성상 시내버스로 청양의료원이 위치한 읍내까지 나오는 데 1시간 30분이나 걸려 고령의 어르신들은 병원을 방문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프면 마을에 있는 보건진료소를 찾는 게 전부다. 청남면 내직1리 김한숙 이장은 “평소에도 병원 한 번 가기 어려운 산골 마을인데 이렇게 의료진이 마을까지 찾아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찾아가는 의료원은 일회성 진료에 그치지 않는다. 진료를 받은 주민 개개인의 건강을 관리하고 병증의 진행 상황에 따라 상급병원으로 연계서비스도 진행한다. 병원을 찾기 어려운 주민을 위해서는 보건진료소와 청양의료원 간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원격 협진도 이뤄진다. 청양의료원 소속 방문간호사, 읍·면 사회복지사와 연계한 통합돌봄도 연계하고 있다.

김돈곤 청양군수는 “단순한 의료 서비스를 넘어 주민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며 실제로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는 사업”이라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삶의 질을 높이도록 돕는 게 지자체의 역할”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