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포가신(黃袍加身). 바이두
조광윤은 무인 집안에서 출생했다. 지혜로운 모친 두(杜)씨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며 문무를 겸비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건장한 체격에 창술, 봉술 등 무술 실력이 뛰어나 군주의 총애를 받는 젊은 장수였다. 스스로 권법을 창시할 정도로 상체 몸놀림이 민첩했고, 발로 공을 다루는 기량도 뛰어났다.

조광윤(趙匡胤). 바이두
조광윤의 송나라 개국은 엄밀하게 평가하면, ‘진교병변(陳橋兵變)’이란 군사정변을 거친 것이었다. 시영의 8살짜리 아들인 황제를 무력으로 위협하고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조광윤은 이 과정에서 무력 충돌을 자제했고, 시영의 후손들을 적극 보호했다.
‘시씨의 후손은 죄가 있어도 벌을 주지 말라. 심지어 역모의 죄를 짓더라도 그냥 옥중에서 자결하게 해주고, 저잣거리에서 공개 처형하지 말라. 죄와 벌을 그의 친인척에게 연좌해서도 안 된다.’ 조광윤이 돌에 새겨 후계자들에게 전한 석각유훈(石刻遺訓) 가운데 첫 당부다. 요절한 보스 시영을 향한 그의 복잡한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3세에 송나라를 개국한 조광윤은 약 10년에 걸친 군사 활동 끝에 중국 북부를 거의 통일했다. 내부적으론 과거제도를 보강했다. 최종 시험에 직접 참관하는 등 관료 선발 과정의 부패 방지에도 힘썼다.
문치(文治)를 향한 그의 집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더라도, 사대부를 죽여서는 안 된다.’ ‘석각유훈’의 한 문장이다. 간결하지만,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송나라에서 문인들이 마음껏 저술하고 소신을 갖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기초가 바로 이 한 문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조광윤의 일생에 모친이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모친 두씨는 고관의 아내였음에도 사치를 삼갔고 늘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안타깝게도 조광윤은 황제에 오른 이듬해에 모친과 사별했다.

송나라 문인들의 여가활동. 바이두
연회에 참석한 장수들은 그의 대안 제시에 모두 동의하고 병권을 순순히 내놓는다. 내용은 쿠데타 예방을 위한 긴장감 넘치는 권력투쟁이지만, 꽤 신선하고 설득력도 갖춘 형식이었기에 역사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조광윤은 49세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 병에 걸리고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제위를 아들이 아닌 동생이 계승했기에 독살설 등 여러 의혹이 존재한다.
난세를 치세로 바꾼 송 태조(太祖) 조광윤의 삶 전체를 ‘경륜(經綸)’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요약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준비가 충분히 안 된 상태에서 젊은 나이에 리더로 부상해도, 만약 들뜨지 않고 시대적 소명에 집중하면 탁월한 리더십 발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차이나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