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벚꽃 명소는 여의도 아닌 이곳

 
서울의 과거 벚꽃 명소는 여의도가 아니라 강북구 수유동 일대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수유동의 150년을 미시적으로 추적한 『수유동: 느린 도시, 살아있는 공동체』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6일 밝혔다.

보고서는 186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수유동의 변화 과정을 생활문화, 역사적 사건, 주민 주도 도시재생을 축으로 구성했다. 이를 통해 수유동이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서울의 원조 벚꽃 명소이자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공간 중 한 곳임을 밝혀냈다.  

강북구 수유1동(빨래골) 전경. 이곳은 고밀도 개발 대신 주민 주도의 저밀도 개발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사진 서울시

강북구 수유1동(빨래골) 전경. 이곳은 고밀도 개발 대신 주민 주도의 저밀도 개발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사진 서울시

 
보고서에 따르면 '수유리’라는 이름은 1865년(고종2)부터 등장한다. 1949년 8월 13일, 서울시 성북구로 편입된 수유리는 1950년 ‘수유동’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현재까지도 ‘수유리’라는 이름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  
수유동은 북한산 골짜기에 자리해 ‘수유(水逾ㆍ물이 넘침)’, ‘빨래골’ 등 맑은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수도폭포와 구천폭포 등 빼어난 자연환경 덕분에 한때 ‘숨겨진 명승지’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 근교의 대표 벚꽃 명소로도 이름을 알렸다. 

수유동에 벚꽃이 심어진 건 1700년대라고 한다. 조선 후기 문신인 홍양호(1724~1802)는 우이동에 별장과 묘소를 두었고, 일본에 아름다운 꽃나무 이야기를 듣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벚꽃 묘목 수백 그루를 들여와 심었다고 한다. 우이동과 수유동 일대가 서울 최초의 벚꽃 명소가 된 배경이다.  

수유동은 ‘민주주의의 성지’ 중 한 곳으로도 꼽힌다. 수유동 산 9-1번지에 위치한 국립4ㆍ19민주묘지는 1960년 4ㆍ19혁명의 희생자 199위를 모신 곳이다. 묘역은 당초 남산에 조성될 뻔했으나, 여러 논의 끝에 1963년 9월 수유동에 약 3000평 규모로 조성됐다. 1993년 4월 19일에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4ㆍ19묘역 성역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 사업으로 묘역 면적은 4만 2975㎡(약 1만3000평)에서 13만 5537㎡(약 4만1000평)로 대폭 확장됐다.  


1980년대 후반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사진 왼쪽부터) 등 야당 정치인들이 수유동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국회 운영 방안 등을 논의하던 모습. 사진 서울시

1980년대 후반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사진 왼쪽부터) 등 야당 정치인들이 수유동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국회 운영 방안 등을 논의하던 모습. 사진 서울시

 
인근의 아카데미하우스는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가 독일 자본으로 건립한 본부 건물이다. 6000평 대지에 회의실, 호텔, 식당 등을 갖췄다. 이곳에선 1970~1980년대 여성운동, 통일 논의 등 민주화 담론이 활발히 이뤄졌다.  
1988년에는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 등 야당 지도자들이 이곳에 모여 13대 국회 운영 방향과 정책을 논의한 현장이기도 하다.

한편 수유동은 대규모 재개발 대신, 주민들이 마을 안에서부터 삶의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대안적 도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고층 아파트보다 낮은 다세대주택, 오래된 전통시장, 주민이 직접 만든 커뮤니티 공간이 공존한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기록은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도구”라며 “수유동의 변화는 서울 곳곳에서 진행 중인 생활 문화 실천의 좋은 본보기”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