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을 공동 연출한 곽경택 감독을 20일 삼청동 카페 슬로우파크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참전했지만, 그 당시에 나이도 어리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을 못 했습니다. 우리가 했던 일에 대한 것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 의미를 알았지요.”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 류병추 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참전용사 배수용씨는 “살아있는 동지들이 전우들을 위해 1년에 한 번 위령제를 지내보자고 해서 모인지 벌써 한 40년이 됐다. 머릿속 필름이 토막토막 끊겨있었는데 오늘 영화를 보면서 ‘저게 맞다!’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달 25일 개봉에 앞서 지난달 6일,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 기념식과 함께 열린 ‘장사리:잊혀진 영웅들’(감독 곽경택‧김태훈) 시사회는 울음바다였다.
영화는 69년 전 9월 14일, 영덕 장사해변에서 벌어진 상륙작전 실화가 토대다. 한국전쟁 중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려 하루 전 급히 진행된 양동작전이었다. 평균나이 17세, 고작 2주 훈련한 학도병 772명이 군복도, 군번줄도 제대로 없이 악천후 속 빗발치는 총알을 맞으며 전투에 투입됐다. 살아남은 용사들은 이제 80~90대. 무수한 희생을 낳았지만, 비밀작전이란 이유로 지금껏 역사에 감춰졌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변에 지어진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문산호 전경. [사진 영덕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참전하셨다는 것만 알다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남기신 일기장을 읽었어요. 참전 당시 기록이 생생했는데 영화 보는 내내 너무 흡사해서….” 고인이 된 참전용사 배주호씨의 아들 배기수씨는 자신도 36년 군생활을 하고 대령으로 전역했다면서 끝내 눈물을 내비쳤다.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학도병 분대장 최성필(오른쪽 정면)이 총을 든 모습. 아이돌 그룹 샤이니 멤버 최민호가 진솔한 연기를 펼쳤다. 이 영화를 마치고 그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현재 복무 중이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인천상륙작전을 5000분의 1 확률로 성공시킨 바탕이죠. 당시 원산‧군산에도 위장작전이 있었지만, 실제 전투병력이 파견된 건 장사뿐이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이 워낙 급해 정규병력 대신 이제 막 모집한 학도병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런 작전입니다.”
‘아이리스’ 시리즈의 김태훈 감독과 공동연출에 나선 곽경택(53) 감독의 말이다. 개봉 전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장사해변 근처에서 촬영하며 당시 살기 위해 뛰고 굴렀을 소년들을 항상 생각했다”면서 “그분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으로 고마움과 존경심을 담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저건 아닌데…’ 하실까 봐 고증에 가장 신경 썼다. 원래 교각 전투였던 것을 여건상 터널로 바꾼 것도 상당히 찔렸다. 올해 여든여섯 되신 장사리유격동지회 류병추 회장님을 촬영 전 찾아뵀는데 ‘어떻게 그렇게 우리를 보냈는지 지금도 이해 안 간다‘고 하시더라. 그 말씀에 이 이야기는 내가 힘들어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조명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에 도리어 내가 더 고마웠다.”
그날 전장에서 학도병들은 책 대신 생전 처음 총칼을 든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번 영화는 ‘포화 속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잇는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의 한국전쟁 시리즈 중 하나다. 그러나 비극을 다룬 방식은 사뭇 다르다. 잔혹한 북한군과의 대립보단, 하루아침에 가족에서 적이 된 민족상잔의 비극, 갑자기 총칼을 들게 된 학도병들의 애환이 더 깊이 들여다보인다. 제작이 진행되던 와중에 뒤늦게 공동연출을 제안받았다는 곽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만들어낸 부분이다.
“처음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참가를 망설였다”는 그는 “이 영화는 장사리에서 희생당한 학도병 이야기인데 그와 별로 관계없는 듯한, (기존 한국전쟁 영화에서) 기시감이 드는 전형적인 설정들이 불편했다. 인민군 대장 묘사랄지. 제작사 김태원 대표에게 내가 고친 이야기에 동의하면 합류하겠다고 조건을 걸었다”고 했다.
누군가의 피묻은 편지를 읽고 있는 성필(최민호). 영화에선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원치 않는 이념 전쟁에 휘말린 사연도 드러난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또 “처음부터 ‘반공’ 영화를 만들겠단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반전의 메시지를 많이 담았다”고 했다. “제가 실향민 아버지를 뒀다. 쉽게 말해 이북 사람의 피가 있다”면서 “저희 아버지가 평안남도 고향인데 열일곱에 피란을 왔다. 둘째 형님도 극적으로 왔지만, 나머지 가족은 이북에 있다. 우리 아이나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전쟁 나면 친척끼리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자연스레 영화에 담겼다”고 돌이켰다.
“요즘 한반도 정세를 보며 ‘우리 힘으로 독립을 못 했고 강대국들의 이데올로기적 대리전을 치르느라 우리 민족끼리 싸워야 했던 게 6‧25였다’는 생전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어요. 우리 스스로가 과거의 불행을 기억하고 뭔가 배우지 못하면 앞으로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일 크게는 유격대를 이끄는 이명준(김명민) 대위 캐릭터의 축을 확실히 다졌다. 이 학생들이 어떤 이유로 참전하게 됐는지 모집의 주체, 리더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원래 시나리오에선 너무 불분명했다. 옛 자료를 살펴보니 기록이 다 있더라. 이명준의 실존 인물이 이명흠 대위인데, 그는 평양 북쪽 신해주 출신이다. 정치외교를 전공했고 크리스천이었다. 종교를 인정 안 하는 공산 치하에 살 수 없어 가족과 남하했다가 자유민주주의가 유지돼야 한다는 위기감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남침 당한 후엔 북한군에 유격대가 있다는 걸 알고 이런 부대의 효율성을 우리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직접 학생들을 모집해 훈련했는데 갑자기 참전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지니 차라리 함께 전투에 뛰어든 것이었다.”
극 중 학도병을 이끄는 유격대 이명준(김명민) 대위는 당시 실존 인물 이명흠 대위를 토대로 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작보고회 당시 배우 김명민은 “이명흠 대위는 학도병의 안타까운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들에게 군번줄을 지급하는데 평생을 바쳤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군의 임춘봉(동방우) 준장은 안타고니스트로 그려진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총알받이로 전장에 보내곤 나 몰라라 한다. 곽 감독은 “우리가 총칼을 들고 싸운 건 북한군이 맞지만 적은 내부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점심은 개성에서 먹고 저녁은 함흥에서 먹게 해주겠다’며 정보력도 없이 정치꾼 노릇만 하다 결국 남침 공격에 일거에 무너지는 빌미를 만든 사람들을 반영했다”고 했다.
'트랜스포머' 등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 스타 메간 폭스가 종군기자 매기 역으로 연기 변신에 나섰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학도병 역 배우들의 진심 어린 눈빛도 좋다. 다소 신파적인 사연, 북한 말투 등 어색한 장면도 있지만, 서로 똘똘 뭉친 마음만은 십분 와 닿는다. 한겨울에 촬영이 진행돼 현장이 실제 전장을 방불케 했다. 특히 학도병 분대장 최성필 역의 아이돌그룹 샤이니 멤버 최민호와, 라이벌 학도병 기하륜 역 김성철(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아스달 연대기’)의 호흡이 눈에 띈다. 곽 감독은 “민호군은 첫 만남부터 되게 씩씩하고 올곧았다. 눈이 너무 커서 걱정했는데 막상 화면에 잘 받더라. 무엇보다 참여 의지가 강했다”고 했다. “성철군도 첫눈에 딱 삐뚜름한 반항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기운을 실감나게 담기 위해 대형 액션을 욕심내기보단 현실 상황에 놓인 것처럼 여러 대 카메라를 동원해 다큐멘터리처럼 촬영을 진행했다.
메간 폭스가 지난달 2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제작보고회에 참석해 곽경택 감독(오른쪽)과의 촬영 뒷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뉴스1]
이번 영화는 할리우드 스타 메간 폭스도 짧고 굵게 출연했다. ‘트랜스포머’ 등 액션 블록버스터를 주로 해온 그가 종군기자 매기 역으로 연기 변신에 나섰다. 매기는 한국전쟁 보도로 여성 최초 퓰리처상을 받은 마가렛 히긴스와 당시 여러 여성 종군기자를 토대로 한 인물. 특히 히긴스는 저서 『워 인 코리아』를 펴내고 “귀신 잡는 해병대”란 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곽 감독은 “메간 폭스가 장염으로 힘든 상태에서 한국에 와 링거를 맞아가며 영화를 찍었다”면서 “세트 촬영이 지연되면 하루에 돈이 몇 천만 원씩 나가는 상황이라, 촬영을 미룰 수가 없었는데 최선을 다해줬다. 자신의 모습을 도전적으로 바꿨다”고 했다.
25일 개봉 이후 영화는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다. 순제작비 125억원으로, 손익분기점은 400만명. 금요일까지 사흘간 관객 수는 아직 29만명이지만, 남은 주말 관객몰이가 내다보인다.
곽 감독은 무엇보다 이번 영화가 태극기를 든 윗세대와 청년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젊은 세대는 저분들도 자신들 같은 나이, 저런 시절이 있었단 걸 이 영화로 알았으면 좋겠어요. 나이 드신 분들은 변화하는 세대를 인정해줬으면 좋겠고요. 윗세대가 지켜낸 우리나라지만, 대한민국은 계속 변화하는 나라니까요.”
영화에서 학도병을 전장에 내보낸 임춘봉 준장(왼쪽 정면)은 배우 동방우가 연기했다.[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