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 혁신성장 연구
다음 달 창립 60주년을 맞는 SK이노베이션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에서 출발했다. 1980년 선경(SK의 전신)에 인수된 이후 석유화학, 종합에너지, 바이오, 배터리와 그린에너지까지 섭렵하면서 지난 60년간 변신과 성장을 거듭해왔다. 오늘날 SK를 재계 2위 대그룹으로 만든 토대가 된 SK이노베이션의 혁신성장 10가지 성공비결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달 30일 기업가정신학회 주최로 열렸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영 인사이트를 발굴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과 연구결과를 정리해 연재한다. 첫 번째 혁신성장 스토리는 SK의 석유사업 진출에서 확인되는 기업가 정신. 이춘우 기업가정신학회장(서울시립대 교수)의 분석 발표를 토대로 정리했다.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
선경(SK의 전신)이 자신보다 수백 배나 큰 대한석유공사를 1980년 인수하자 나온 이야기다. 기업 운영이 정상적으로 될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그러나 준비된 새우는 고래도 삼킬 수 있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겐 섬유업체로만 알려져 있던 선경에 정부가 석유공사를 넘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선경은 우리나라 종합상사로는 처음으로 상당량의 원유를 공급했고, 앞으로 원유 추가 확보 잠재력이 있으며, 산유국과의 친분도 두터워 오일머니 유치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선경의 대한석유공사 인수 관련 신문 보도 모음. 사진 SK이노베이션

대한석유공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걸프사가 합작해 설립했다. 1962년 울산정유공장 첫 삽을 떴다. 사진 SK이노베이션

1969년 내서널지오그래픽 3월호 '아시아의 성공 스토리 대한민국' 기사에 실린 울산정유공장 옛 모습. 원유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석유사업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과제였다. 사진 SK이노베이션
종합석유기업 향한 빅픽처
하지만 공장을 짓기엔 자금, 기술, 운영능력이 거의 전무했다. 일본 데이진, 이토추 등 관계를 쌓아온 큰 외국회사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데이진에서 현물차관을 들여오고, 이에 대한 지급보증은 이토추가 서게 만드는 방식으로 자금난과 기술도입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선경은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완공하고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까지 건립하면서 단숨에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뛰어올랐다. 원사의 원료인 원유에 관심을 기울인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에너지 위기에서 발휘된 기업가정신
그러나 정유공장 건설 계획은 1973년 예기치 못한 중동 전쟁 발발 탓에 수포가 되었다. 공장 건설만 무산된 게 아니었다. 한국은 중동국가에 비우호국으로 분류돼 석유 수입 길이 막혔다. 1차 에너지 파동이었다. 국가 원유 재고가 열흘 치 밖에 안될 정도로 급박했던 시기, 사우디 왕실과 꾸준히 친분을 쌓아왔던 선경은 석유 수출금지 엠바고를 풀어 한국에 원유를 도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78년 2차 오일쇼크 때도 선경은 정부 책사 자격으로 사우디에 대한민국 총수요를 넘어서는 하루 5만 배럴 공급을 요청했다. 자체 기업 운영에 필요 물량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필요한 물량을 고려한 것이다. 최종현 SK 선대회장의 기업가정신이 발휘된 주목할만한 지점이다.

SK이노베이션의 울산 CLX 전경. 사진 SK이노베이션
자체 기술 없으면 미래 없다
눈앞의 이익 대신 길게 보고 네트워크 육성
정신혁신, 선경 고유의 혁신언어 창안
선경은 이미 70년대에 기업의 핵심 이해관계자가 고객·종업원·주주, 나아가 국가와 사회임을 인식했다. 미국의 글로벌기업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BRT(Business Round Table)가 2018년에야 주주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증진하는 사회적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선경은 이미 반세기 전부터 이를 인식하고 실천한, 매우 선진적인 기업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춘우 기업가정신학회장 인터뷰
SK이노베이션 60년 혁신성장 연구 좌장을 맡아 프로젝트를 이끄셨는데요. 연구를 시작한 계기와 소감이 궁금합니다.
SK이노베이션은 그런 본질 자체를 그룹 사명으로 붙여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연구하며 들여다보니 비즈니스 밸류 체인의 안정화를 추구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캐시(Cash)로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즉 R&BD(Research and Business Development)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기업가정신의 정석이자 진정한 기업의 본분,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경영을 하는 회사의 모습을 봐서 좋았습니다."
석유사업 진출을 연구 테마로 선정하신 이유는요.
이번 심포지엄에서 SK이노베이션의 혁신을 ‘마스터 혁신 플래닝 경영’이라고 명명하셨는데요.
연구를 진행하며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을 꼽는다면.
SK이노베이션은 자신만의 혁신의 언어를 만들어서 공유하는데요. 수펙스 정신이 그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제가 30년 동안 연구한 바로는, 철학이 있는 회사가 성장해요. 뭘 하는지 모르면 역량을 집중할 수가 없는 거죠. 사명감과 소명감도 매우 중요합니다. SK를 비롯한 대기업들은 우리가 잘못하면 나라가 잘못된다는 의식을 많이 갖고 있어요.
선경과 유공도 마찬가집니다. 에너지가 공급 안 되면 국가가 마비됩니다. 원유사업이 선경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 굉장히 중요한 사업이라는 소명감을 가지고 진출했어요. 선경의 사업보국 정신은 이미 그 시기에 뿌리가 내려져 있거든요. 사업을 제대로 하면 이윤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정신과 원칙, 철학 없이 돈만 쫓아다니며 비즈니스를 하면 실패해요. 이건 사람이나 기업이나 똑같습니다. 정도를 걸으면 돈은 벌리거든요. 최종현 회장은 이러한 핵심을 정확히 잡고 비즈니스를 하셨어요."
SK이노베이션의 혁신이 우리나라의 성장발전이나 기업경영에 던지는 의미나 화두는 무엇일까요.
SK이노베이션은 끊임없이 혁신을 해왔잖아요. 앞으로는 모델이 있는, 답이 있는 비즈니스를 배워서 더 잘하는 전략이 아니라 구글이나 애플처럼 기존에는 가시적이지 않았던 새로운 걸 창조하는 도전을 해야 합니다. SK이노베이션은 계속 도전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학습해가며 진짜 개척과 창조를 하는 비즈니스를 해 나가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