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일 부산항 신선대 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엔저에도 수출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 수출 기업의 ‘엔저 공습’ 공식이 깨지고 있다. 올해 들어 엔화는 달러당 140엔대까지 추락했지만 국내 수출 기업은 과거보다 엔저 영향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되레 “경기 침체로 수출이 줄어든 게 더 걱정”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가 나온다.
전통적으로 엔저는 수출 기업에 부정적인 신호였다. 불과 7~8년 전만 해도 엔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 이와 경쟁하는 국내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하락해 크게 타격을 받았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석유화학·자동차·철강 업계에 엔저는 치명타였다. 엔화 가치가 1% 떨어지면 현대차 수출이 0.96%(약 1만 대) 줄어든다는 분석도 있었다.
지난 2012년이 대표적이다.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주도한 엔저 정책으로 일본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얻으면서 한국의 수출은 눈에 띄게 줄었다. 2012년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은 4.4%를 기록했으나 엔저 정책 이후 2014년에는 2.3%에 그쳤다. 당시 달러당 120.4엔을 기록할 정도로 엔화 가치가 낮았다.
하지만 이번엔 엔저가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6% 증가한 566억7000만 달러(약 78조원)를 기록했다. 에너지 수입이 크게 늘면서 무역수지는 마이너스다.
국내 기업도 엔저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석유화학 업계가 대표적이다. 국내 대형 화학사 관계자는 “엔저보다 경기 침체가 더 두렵다”며 “화학 업종은 경기에 민감한데 올 들어 주문이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무역협회는 올해 석유화학 품목 수출량이 상반기 305억 달러에서 하반기에는 299억 달러로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홍지상 무역협회 연구위원은 “여기에다 대규모 증설에 따른 공급 과잉으로 석유화학 품목의 경우 수출 업황 악화가 전망된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 보관된 엔화 지폐. 올해 들어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차, 친환경차 미국 판매량 늘어
반면 일본 완성차 업체는 같은 기간 판매량이 줄었다. 도요타와 혼다는 각각 -9.8%, -37.7%로 역성장했다. 이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건 가파르게 변화하는 산업구조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탓이 크다. 하이브리드에서 앞섰던 일본 완성차 업계는 전기차 시장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토요타는 자사 최초로 선보인 전기차 bZ4X가 주행 중 바퀴가 빠질 수 있어 전량 리콜을 선언하기도 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친환경차 전쟁에서 일본차가 힘을 쓰지 못하면서 엔저 불황은 옛말이 됐다”고 평가했다.

달러-엔 환율 추이. 9월 들어 1달러당 140엔으로 엔저 현상이 가팔라지고 있다.
철강도 엔저 불황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수입하는 원자재를 달러로 결제하고 있어 엔저보다 달러 강세가 더 큰 걱정거리”라고 말했다. 일본 철강사는 엔화 약세 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 철강신문은 최근 “지난 5월 이후 국제 철강 가격이 하락하면서 수출이 크게 늘지 않았는데 수입 원재료 가격은 오르면서 엔화 약세가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한국 기업이 엔저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엔저 위협 벗어나려면 서비스 수지 개선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엔저는 국내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김찬희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엔저가 장기화할 경우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석유·철강·자동차 등에서 피해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엔저를 위협으로 여기는 건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사고 때문”이라며 “여행·금융 등 서비스 수지를 개선할 수 있도록 산업구조를 선진화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