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가 기로에 섰다. 회사가 ‘메모리 경쟁력 회복’에 우선 순위를 두며 파운드리 투자를 축소하고 인력 배치를 조정하고 있다.
그러자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와 디자인하우스에서는 “큰 형님이 힘드니 업계가 다 어렵다”는 한숨이 나온다.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는 파운드리 중심으로 팹리스(설계)-디자인하우스-장비업체-후공정 등이 긴밀히 연계되는데, 파운드리가 위축되면 줄줄이 일감이 끊긴다.
삼성 파운드리가 선 자리는 곧 한국 전자산업의 기로다. ‘똑같은 걸 싸게 만드는’ 양산 경쟁력에서, ‘고객과 시장을 읽어내는’ 기획·서비스 경쟁력으로의 전환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파운드리에 대해 “사업을 키우려는 열망이 크다”라며 “분사에는 관심 없다”라고 말했다. 오너의 의지가 확인된 만큼, 단기 성과를 넘어 이를 일관되게 실현할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 삼성에 필요한 건 오직 한 명의 선각자”이며 “그렇지 않으면 위험을 꺼리는 관료주의 기업일 뿐”이라고, 『삼성 라이징』 저자 제프리 케인은 최근 중앙일보 e메일 인터뷰에서 말했다.
‘TSMC 모방’ 아닌 ‘삼성의 전략’ 필요하다
정부가 지분 49%를 보유하고 적임자를 초빙해 TSMC를 시작한 대만과, 50년 전 민간 기업가의 결단으로 시작한 한국의 반도체는 태생부터 다르다. TSMC는 1992년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와 특수 관계다. 대만 국가발전위원회(NDC) 장관은 TSMC 이사회의 일원이며, 대만에는 TSMC 최첨단 공정을 자국 내에 둬야 한다는 기술보호 규정도 있다.
그런데 복수의 전직 삼성 임원들에 따르면, 지난 4~5년 사이 삼성 파운드리는 TSMC가 검증한 성공의 방식을 좇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삼성 파운드리는 애플·테슬라 등의 주문형반도체(ASIC)를 설계·제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으나, 이를 파운드리 사업부에서 하는 게 맞느냐는 내부 논쟁 끝에 ‘TSMC는 ASIC을 안 한다’는 이유로 이를 시스템LSI 사업부로 이관했다는 것. 당시 삼성의 ASIC 경쟁사였던 브로드컴은 이후 잇단 대형 인수합병(M&A)을 거쳐 이후 압도적인 ASIC 1위가 됐고, 구글과 오픈AI가 주문한 칩 생산을 맡고 있다.
인텔 ‘패키징’ 전략, 삼성의 미래 대비는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는 “메모리반도체도 앞으로는 범용보다는 AI용, 하이브리드, 코어-메모리 통합 등으로 다양화될 가능성이 크다”라며 “삼성이 기존 메모리 사업 전략을 고수하는 게 유리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시스템 혹은 메모리 중 하나만 바라보는 단선 전략이 아니라, 새로운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반영한 전략적 변신으로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어려운 때일수록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며 “삼성 파운드리도 현재 상황이 어렵더라도 엑시노스 AP나 CMOS 이미지 센서 같은 핵심 라인을 전략적으로 남겨둬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규동 가온칩스 대표는 “2년 전 문제였던 삼성 5나노 수율도 이제 잡히지 않았나”라며 “삼성 안팎 모두 꾸준함과 인내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삼성 파운드리 4나노 고객사인 미국 AI 반도체 회사 그로크의 조나단 로스 CEO는 중앙일보에 “한국에서 생산된 칩이 이미 시장에 나왔고, 텍사스 테일러의 삼성 공장 완공 후 주문량을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당장의 실적 성과보다 장기적인 전략을 세울 ‘기술 경영’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제프리 케인은 “소니가 몰락한 건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 사후에 ‘부엌에 너무 많은 요리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 삼성은 가야할 길을 안내할 한 명의 선지자, 스타(경영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