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의무 규정을 24년간 개정하지 않은 건 국가의 행정‧입법 미비’라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휠체어 사용 지체장애인 원고 2명에게 각 10만원씩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장애인 접근권’을 헌법상 기본권의 지위로 인정한 최초의 대법원 판결이다.
쟁점은 바닥 면적 300㎡ 이상 소매점에만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부과한 구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었다. 전체 소매점의 약 95%가 의무에서 제외되는 조항이다. 편의점 등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가게도 입구 장애인 경사로 등 편의시설 설치 의무에서 제외된다.
이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지체장애인 2명 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장애인 등 편의증진법에 따르면 국가가 장애인 등 접근권을 보장하는 형태의 대통령령을 만들어야 하는데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정한 ‘국가의 장애인 차별 방지 및 시정 의무’도 위반했다”는 이유다. 처음엔 1억 8000만원을 청구했다가, 2심부터는 1500만원으로 청구액을 수정했다. 하급심에선 ‘규정을 고치지 않은 것이 위법하더라도, 국가의 고의 또는 과실이라고까지 볼 수 없다’며 배상책임을 물리긴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장애인의 접근권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권리로, 헌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며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의무 규정이 사회적 공감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행정청은 규정을 개정해 실질적으로 장애인 접근권을 개선할 의무를 부담한다. 이를 이유없이 하지 않았을 경우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최소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2008년에는 소규모 소매점의 장애인 접근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보고, 규정을 개선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2008년 이후로도 14년이 넘도록 규정을 개선하지 않아 불이행의 정도가 매우 크고, 법률이 보장하려고 한 지체장애인의 접근권이 유명무실해졌으므로 국가의 입법부작위는 위법하다”고 밝혔다. 또 그간 여러 장애인 단체와 UN, 인권위 등의 지적으로 문제점을 인식하고서도 개정하지 않은 건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국가배상 책임도 인정된다고 했다.
대법원은 “장애인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일상적으로 침해받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감내하여 왔다”며 원고들이 받은 정신적 손해도 인정했다. 그러면서 “위법한 행정입법 부작위로 인해 장애인이 겪었을 고통에 위자료를 지급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국가에 적시‧적절한 행정입법 의무 이행 및 적극적 장애인 보호정책 시행을 촉구하는 수단으로 의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 판결로 손해를 추후 주장할 수 있는 피해자의 범위가 넓고, 국가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배상액을 10만원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