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불어닥친 ‘계엄 한파’에 내수 심리가 얼어붙으면서 영세 자영업자들은 유독 추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됐다.
25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로 북적여야 할 극장가 매표소는 비교적 한산했다. 아르코 미술관 앞 광장을 환히 밝히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커플들만 몇 보일 뿐이었다. 거리에서 인근 소극장 티켓을 한꺼번에 모아 판매하는 서모(30)씨는 “크리스마스 매진을 기대하고 극장들도 공연 횟수를 늘렸는데 오늘은 늘려놓은 좌석이 안 차는 상황”이라며 “지난해 크리스마스와 비교하면 30~40% 수준으로 팔렸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오전 8시 30분부터 티켓을 판매한 그는 6시간이 넘도록 10매를 채 못 팔았다고 한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지난 24일 오후 기준 12월 1~23일 집계된 공연 예매 취소는 총 111만980건으로, 계엄 당일인 지난 3일에는 하루에만 9만3470장이 취소돼 올해 최대치를 기록했다. 대학로 한 소극장 매표소 직원 박모(32)씨는 “경기가 안 좋아 사람들이 외식을 줄인다고들 하는데 그보다 먼저 지갑이 닫히는 건 문화·예술 소비인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날 남자친구와 함께 대학로를 찾은 김모(25)씨는 “이렇게 조용한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라며 “젊은이들이 많은 대학로인데도 생각보다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지 않아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코로나 때보다 매출 줄어"
크리스마스 케이크·쿠키 등이 불티나게 팔려야 할 제과점도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창신동에서 16년째 빵집을 운영해 온 김성식(68)씨는 “지난해엔 단골들이 성탄절 케이크를 해 달라고 주문 제작해 10개 가까이 팔았는데 올해는 해 달라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며 “값이 싼 롤케이크라도 팔릴 줄 알았더니 오늘은 2개밖에 안 나갔다”고 했다. 형형 색깔 리본 장식의 케이크들로 꽉 찬 진열장과 달리 테이블은 텅 빈 제과점에 앉아 있던 사장 채모(50)씨는 “직장인 상권이라 주로 낮에 팔리는데 지금까지도 별로 안 나간 거 보면 연말 장사는 끝난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반면, 백화점·대형마트 등에 입점한 기업형 상점들은 성탄 대목을 맞아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서울 여의도 더현대에 입점한 한 베이글 상점은 이날 1000명이 넘는 손님들이 찾은 가운데 오후 4시 기준 356팀이 대기 줄을 서 가게에 들어가는 데만 해도 3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같은 백화점 5층에 위치한 레고·디즈니 장난감 가게에도 유아차를 갖고 온 부부와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직원 권모(23)씨는 “꾸준히 마니아층이 있는 장난감이어서 그런지 올해 성탄절이라고 딱히 매출 차이를 느끼진 못하겠다”며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이만 가달라”고 했다.
불황은 통계로도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지난 24일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88.4로, 11월보다 12.3포인트 낮아졌다. 황희진 한국은행 통계조사 팀장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얼마나 빨리 해소되고 안정을 찾아가느냐에 따라 소비심리 회복 속도도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경기가 안 좋아지더라도 소비를 이어가지만 중산층 이하 서민들은 씀씀이를 확 줄이게 된다”며 “이들의 주요 소비처였던 소규모 가게들이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치적 혼란에 경제마저 매몰되면 안 된다”며 “연말-새해 분위기를 타고 소비가 활발해질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