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87’ 길을 묻다
12·3 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권력자 개인의 과오만큼 ‘87년 체제’의 불완전성을 고스란히 노출했다는 평가다.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에 주요 정치인의 의견을 릴레이로 전달한다. 일곱 번째 인터뷰는 국민의힘 김재섭 의원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만큼 갈등의 한복판에 적나라하게 내던져진 정치인도 드물다. 그는 계엄 선포 이후 국회로 달려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여당 의원 18명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첫 탄핵소추안 표결 땐 당의 방침에 따라 불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에 거취를 일임하겠다고 한 만큼, 탄핵보다 조기 하야가 답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표결 불참 직후 김 의원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지역구 사무실에 오물이 흩뿌려질 땐 “달게 받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와 딸이 머무는 집 앞에 놓인 커터칼을 발견했을 땐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후 윤 대통령이 하야를 거부하자 김 의원은 탄핵 찬성으로 입장을 틀었다. 그러자 이번엔 보수 단체 등에서 거친 욕설과 항의가 쏟아졌다.
김 의원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 모든 사달의 근본 원인은 계엄을 선포해 국민과 여당을 배신한 윤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줄이는 개헌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김 의원은 “헌법기관이나 독립기관이 권력을 견제하고, 때로는 부당한 개입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들 기관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을 배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교롭게 그는 ‘87년 체제’가 시작된 1987년에 태어나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정치인이다. 그는 “40대 대통령, 30대 국무총리가 등장할 때도 됐다”며 정치 세대 교체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했고, 1일 전화로 조금 더 물었다.
지난달 7일 첫 탄핵 표결에 불참했다.
“계엄 나흘 만에 탄핵안을 가결하기보다는 윤 대통령을 최대한 빨리 하야시키는 게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당에 거취를 일임한다는 대통령을 믿었다. 표결 전 열린 의원총회에선 ‘반대표를 던지더라도 표결에 참여하자’고 주장했다. 야유가 쏟아졌고, 곧바로 이어진 거수 투표에서 9대1 정도로 불참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왜 본인에게 대중의 비난이 집중됐다고 보나.
“그만큼 제가 소신에 따라 정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셨던 것 아니겠나. 비판도, 질책도, 비난도 무겁게 안고 가겠다.”
결국 두 번째인 지난달 14일엔 탄핵 찬성표를 던졌다.
“윤 대통령이 ‘끝까지 싸우겠다’고 돌변했기 때문이다. 질서 있는 퇴진이 무산된 이상 탄핵만이 해결책이라고 봤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 두 명을 임명했다.
“잘한 결정이다. 남은 한 명도 여야 합의로 신속하게 임명해야 한다.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도 공포해야 한다. 계엄이 촉발한 현 상황에서 여당도 포기하는 게 있어야 난국이 풀린다. 별개로 권한대행에 대한 줄 탄핵을 겁박하면서 국정을 혼란으로 몰아가는 더불어민주당의 모습은 독재나 다름 없다.”
계엄 사태로 ‘87년 체제’ 종식이 거론된다.
“37년 묵은 87년 체제로 현 시대를 지탱할 수 있겠나. 최근 다섯 대통령 중 세 명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고, 이번 계엄 사태로 그 한계가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한편으론 개인적으로 비통하다. 87년 체제의 주역으로 수십년간 호가호위하다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간 야권 인사들이 계엄을 등에 업고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개헌이 필요하다고 보나.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4년 중임제나, 내각제로 바꾸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외에는 ‘제왕적 총리’도 있지 않나.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하고 견제하는 개헌으로 가야 한다.”
어떻게 권한을 분산하나.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중앙선거관리위원장·감사원장이나 방송통신위원장 같은 헌법기관·독립기관의 수장은 권력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견제하는 ‘비토 플레이어’다. 대통령이 이들의 임명권을 틀어쥐면서 중립성과 국가의 견제 시스템이 무뎌진 것이 계엄 사태라는 비극의 한 원인이다. 대통령이 이들을 임명하지 못하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 중립적인 단체와 학계, 여야 등이 균등하게 참여하는 합의체를 구성해 임명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만으로 될까.
“책임총리제를 헌법에 명문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은 대통령과 대통령실 참모들이 정책을 좌우하고 행정부를 주무르지 않나. 적어도 민생·경제 분야 정책에서는 총리가 그립을 쥐고 행정부를 리드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번 계엄 사태로 보수 진영이 존립 위기에 몰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동훈 전 대표 사퇴 이후 국민의힘에는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 투톱 체제가 꾸려졌지만 일각에선 ‘도로 친윤’라는 비판도 적잖다.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됐던 김 의원은 지난달 30일 당 조직부총장에 임명됐다.
비대위원장 제안을 받았나.
“공식 제안은 아니지만 복수의 당 중진과 의원들의 권유가 있었다. 제가 비대위원장을 맡으면 윤 대통령과 절연하고 당을 해체하는 수준으로 재창당했을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하면 당에 극심한 분란이 생기지 않겠나. 그래서 거절했다.”
지도부에 합류했는데, 당과 부딪히지 않겠나.
“조직부총장으로서 당이 잘못된 길을 갈 땐 눈치 안 보고 목소리를 내겠다.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과 결별하고, 계엄 찬성론자, 부정선거론자들과 관계를 끊은 뒤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