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국토교통부 산하 항공철도사고조사위(항철위)는 지난 11일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에서 블랙박스의 비행기록장치(FDR)와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를 분석한 결과, 사고기가 로컬라이저 둔덕에 충돌하기 약 4분 전부터 두 장치 모두에 자료 저장이 중단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CVR은 기장과 부기장 등 조종실 승무원 간의 대화는 물론 관제사와 승무원 사이 교신내용, 항공기 작동 상태의 소리 및 경고음 등을 녹음하는 장치다. FDR은 항공기의 3차원적인 비행경로와 각 장치의 단위별 작동상태를 디지털, 자기 또는 수치 신호로 기록한다.
사고기는 지난달 29일 오전 8시 59분에 조류충돌(버드스트라이크)로 인한 조난신호(메이데이)를 외친 후 복행을 통보했고, 4분 뒤인 오전 9시 3분께 활주로 끝단에 설치된 로컬라이저 둔덕과 충돌해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했다.
당시 기체 상황이 정확히 어땠는지, 조종사들이 무슨 비상조치를 취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선 블랙박스 기록이 핵심인데 관련 내용이 모두 사라져 버린 셈이다.
전문가들은 기내의 전력공급이 완전히 끊긴 상황(전원 셧다운) 때문으로 추정한다. 황호원 한국항공대 교수는 “블랙박스 기록 미저장은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며 “항공기 전원 공급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항공업계 관계자도 "엔진 2개 중 하나만 살아있어도 전력이 공급된다”며 “설령 둘 다 꺼져도 보조동력장치를 수동으로 켜면 FDR은 작동이 되는데 사고 당시 이마저도 어려웠던 건지 참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원이 다 꺼지면 FDR이 기록할 내용이 없기 때문에 저장이 안 된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또 “CVR은 비상 상황에서 보조배터리가 있으면 10분가량 더 녹음되는데 이 보조배터리는 2018년 이후 생산된 항공기부터 의무 장착이라서 사고기에는 없는 것 같다”고 추정했다. 사고기는 제주항공이 2017년에 민항기 리스업체에서 빌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꼬이면서 사고 원인 조사 역시 애를 먹게 됐다. 일단 항철위는 “조사는 CVR과 FDR 자료만이 아닌 다양한 자료에 대한 분석 등을 통해 이뤄진다”며 “정확한 사고 원인을 가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항공업계 안팎에선 이번 사고가 이례적인 상황의 연속인 탓에 블랙박스 기록 없이 명확한 원인을 밝히긴 쉽지 않을 거란 우려도 나온다. 현재 규명이 필요하다고 지적되는 이례적인 사안들로는 ▶최초 복행 판단 과정 ▶1차 착륙 방향과 반대로 착륙한 이유 등이 꼽힌다.
또 ▶조류 충돌로 엔진 2개가 모두 작동 불능된 경위 ▶수동작동도 가능한 랜딩기어가 안 내려온 이유 ▶동체착륙 이후 속도를 줄이기 위한 항공기 날개의 플랩이 펼쳐지지 않은 이유 등도 꼭 밝혀야 할 부분들이다.
한 항공사 관계자는 “이번 사고는 다른 사고와 달리 이례적인 상황들이 안타깝게도 여럿 겹치면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며 “블랙박스 데이터 없이 정교한 사고 원인 규명이 가능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항철위가 다른 기록과 현장 잔해 분석 등을 통해서 원인을 밝힌다고 해도 그건 사실상 ‘추정’이기 때문에 여러 이해당사자 사이에서 그 해석을 두고 적지 않은 논란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