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삭제시한 100년은 살인"…의사 블랙리스트 '박제' 엄벌 탄원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정유미 판사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혐의를 받는 류모(32)씨에 대한 첫 재판을 20일 열었다. 뉴스1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정유미 판사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혐의를 받는 류모(32)씨에 대한 첫 재판을 20일 열었다. 뉴스1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와 의대생 명단을 해외 사이트에 게시한 혐의를 받는 사직 전공의의 첫 재판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탄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정유미 판사는 20일 사직 전공의 류모(32)씨의 스토킹처벌법 위반,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류씨는 지난 8~9월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2974명의 명단을 해외 사이트 ‘아카이브’ 등에 21차례 게시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자신이 다니던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전임의·전공의 159명의 진료과목과 이름을 류씨에게 제공한 혐의(스토킹혐의 방조)로 불구속 기소된 정모(32)씨도 이날 재판에 출석했다. 류씨의 블랙리스트는 삭제가 사실상 불가능해 아직도 온라인 상에 게시돼 있다. 

국방색 수의를 입고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류씨는 판사가 직업을 묻자 “회사원”이라고 답했다. 정씨는 “의사”라고 답했다. 이날 재판은 검찰의 공소사실 요지 진술만 이뤄졌다. 류씨의 변호인은 기록을 살펴본 뒤 공소사실 인정 여부를 밝히겠다고 했다.

류씨 등이 해외 사이트에 게시한 의료계 블랙리스트 일부. 사진 아카이브 캡처

류씨 등이 해외 사이트에 게시한 의료계 블랙리스트 일부. 사진 아카이브 캡처

 
이날 재판에서는 한 피해자의 변호인이 참석해 류씨에 대한 엄벌을 탄원했다. 변호인은 “피해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의사 단체 카카오톡방에서 퇴출당하는 등 은근한 따돌림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피고인은 본인의 의사 업무를 계속하게 해달라는 취지로 선처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의사들의 평균적 이해관계를 위해 피해자들, 나아가 국민 건강을 담보로 인질극을 벌인 데 대해 엄벌이 선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씨의 블랙리스트에 박제된 서울의 한 대학병원 소속 김모 교수도 지난 17일 류씨에 대한 엄벌 탄원서를 제출했다. 류씨는 아카이브에 “김 교수가 자신이 리베이트를 받았으면서 전공의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취지의 허위사실을 적은 혐의를 받는다.  

재판을 앞둔 지난달 25일 류씨는 김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익명이라는 가면 속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과했다. 그는 “수사 대상이 되기 전까지는 마치 정부 의료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피해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그 부분에 대해 지금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제보자와 사전에 범행을 공모하거나 계획한 사실은 결코 없다”고 주장했다.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뉴스1

 
그러나 김 교수는 “현재 류씨에 대한 선처 계획이 없다”고 중앙일보에 말했다. 김 교수는 엄벌탄원서에서 “피고인은 블랙리스트에 오를 경우 어떤 피해를 볼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자동삭제 시한을 100년으로 설정하여 피해자들을 영구히 의사 사회에서 격리하는 ‘사회적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어 “익명 제보를 본인 스스로 유도하고 제보 내용도 자신이 검증하고 올린 것임을 공언했으면서 책임 회피를 위해 변명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엄벌을 탄원했다.  

실제 류씨는 블랙리스트에 “제가 약속드리는데 30년 뒤에도 이 리스트가 남아있을 것”이라며 “자식분들이 성인이 될 때도 남아 있을 예정인데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다”라고 적은 바 있다. 앞서 유사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전공의 정모씨는 지난해 10월 같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같은 법원 다른 재판부에서 1심 재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