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미인' 떠난 자리에 단원 '흰 매화' 꽃망울…대구 간송미술관 첫 상설전

김홍도, 백매, 종이에 담채, 80.2x51.3㎝.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김홍도, 백매, 종이에 담채, 80.2x51.3㎝.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휘어진 가지 끝마다 점점이 흰 매화 꽃망울. 채 피어나지도 않은 꽃봉오리들이 고혹적이다. 왼쪽 위에 ‘추위에 떨며 홀로 서다, 맑은 새벽에(獨立漱寒淸曉時)-단원’이라고 적었다. 주춤거리는 선 몇 개로 개성 있는 ‘백매(白梅)’를 남긴 이는 단원 김홍도(1745~1806?). 서민적인 풍속화로 친숙한 그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대구 간송미술관 2전시실에 단독 전시된 김홍도의 '백매'. 동료 화가 조희룡이 『호산외사』에 남긴 단원의 매화 에피소드가 함께 적혔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대구 간송미술관 2전시실에 단독 전시된 김홍도의 '백매'. 동료 화가 조희룡이 『호산외사』에 남긴 단원의 매화 에피소드가 함께 적혔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그림 값으로 받은 3000전 중 2000전을 털어 매화를 사고, 남은 돈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매화 술자리를 열었다는 단원이다. 내일 굶어 죽을지언정 오늘 아름답고 시적으로 놀겠다는, 천상 예인의 면모다. 그가 그때 그 매화를 그렸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단원의 ‘백매’ 한 점이 대구 간송미술관 2전시실 하나를 꽉 채웠다. 지난해 개관전 때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단독 전시돼 인산인해를 이뤘던 그 방이다.  

지난해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전에는 2전시실에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단독 전시됐다. 중앙포토

지난해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전에는 2전시실에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단독 전시됐다. 중앙포토

 
간송미술관이 개관 이래 첫 상설전을 개막했다. 1938년 서울 성북동에 ‘보화각(葆華閣)’을 짓고 수집과 연구 기관으로 출발한 이 사립미술관은 1971년 첫 전시 ‘겸재전’으로 세상에 문을 열었다. 이후 1년에 2번 딱 2주씩 전시를 열며 고미술 애호가들을 애태웠는데, 이제 언제든 가서 볼 수 있게 됐다.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왼쪽)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 1938년산 고가구 진열장에 전시됐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왼쪽)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 1938년산 고가구 진열장에 전시됐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대구 간송미술관 전시장 중앙에 자리 잡은 것은 국보 도자기 두 점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1935년 간송 전형필(1906~62)이 일본인 골동상에게서 2만원을 주고 사들인 고려청자의 대표 걸작이다. 기와집 1채가 1000원일 때였다. 조선 후기 백자의 절제된 화려함을 보여주는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파란 청화, 갈색의 철사, 붉은 동화 안료를 한데 사용한 매우 드문 작품이다. 

이 두 대표 도자기가 간송이 1938년 주문해 짠 자단목(로즈우드) 진열장에서 자태를 뽐낸다. 일제강점기 간송은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며 가산을 털어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우리 문화재를 사들였다. 두 국보 도자 앞에 청자와 백자 18점이 도열했다. 


국보 도자 두 점을 중심으로 청자와 백자 18점이 도열해 '도자의 뜰'을 이뤘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보 도자 두 점을 중심으로 청자와 백자 18점이 도열해 '도자의 뜰'을 이뤘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벽에는 조선 회화를 대표하는 삼원(三園,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삼재(三齋,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의 작품과 선조, 정조, 혜경궁 홍씨 등 왕가의 글씨가 걸렸다. 한글 창제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낭독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 은 개관전 때 그대로다. 다만 종이 유물 보존을 위해 이번에는 정교하게 만든 훈민정음 복제본을 내놓았다.  

왼쪽부터 심사정의 '고사은거', 정선의 '금강전도', 이징의 금니산수 '고사한거'가 걸린 1전시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왼쪽부터 심사정의 '고사은거', 정선의 '금강전도', 이징의 금니산수 '고사한거'가 걸린 1전시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백인산 부관장은 "서화 유물의 보존을 위해 전시는 (휴일 제외) 3개월 간격으로 교체하게 된다. 이렇게 이어지는 상설전을 통해 한국 미술사의 대강(大綱)을 훑어볼 수 있도록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개관전이 올림픽으로 치면 대표 선수단 입장이었다면, 올해부터는 ‘종목별 경기’에 들어간다. 4월 기획전이 그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30폭 중 '쌍검대무' 등 일부도 전시됐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30폭 중 '쌍검대무' 등 일부도 전시됐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지난해 9월 초 문 연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전 ‘여세동보-세상 함께 보배 삼아’에는 22만 4000명이 몰렸다. 간송의 장손인 전인건 관장은 “유물의 보호와 쾌적한 관람에 적정하다고 예상했던 17만명을 훌쩍 넘어 긴 줄을 서신 분들께 죄송했다”고 말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국보ㆍ보물 가운데 옮겨올 수 없는 석조물 2건을 제외한 40건 97점이 모두 나온 진귀한 전시였다. 

봄에는 오랜 보수 끝에 성북동 보화각이 재개관했고, 가을부터 유료 전시로 전환했다. 광복절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미디어 전시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를 시작, 지금도 관객을 모으고 있다. 이 전시는 4월 30일까지 열린다. 

윤용(1708~40)의 '협롱채춘: 나물 바구니 끼고 봄을 캐다'은 생략된 배경 속 여인의 뒷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윤용(1708~40)의 '협롱채춘: 나물 바구니 끼고 봄을 캐다'은 생략된 배경 속 여인의 뒷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전 관장은 “더 다양하고 더 가깝게 더 많은 분께 우리 문화유산을 향유할 수 있게 해드리자는 간송미술관의 새로운 방향이 올해부터 본격화된다”고 말했다. 4월에는 용인 호암미술관과 함께 겸재 정선전을 연다. 겸재 탄신 350년이 되는 내년 하반기에는 대구 간송미술관으로 전시를 이어간다.  

건축가 최문규 설계로 지난해 9월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건축가 최문규 설계로 지난해 9월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대구 간송미술관은 대구시가 부지와 사업비 446억원을 국비와 시비로 조달했고,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위탁 운영한다. 3년 단위 계약이며, 입장료 수익은 모두 대구시에 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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