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가 낮거나 매출이 안 나오는 ‘좀비 기업’은 이제 주식 시장에서 사라진다. 금융당국이 상장폐지라는 ‘채찍’을 동원해 국내 주식 시장 저평가 문제를 해소하기로 하면서다.
21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한국거래소 등 유관기관은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기업공개(IPO) 및 상장폐지 제도 개선 공동 세미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현재 상장폐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시가총액 ▶매출액 ▶감사의견 미달 크게 3가지다. 이 중 정량적 평가에 해당하는 시가총액(코스피 50억원·코스닥 40억원)과 매출액(코스피 50억원·코스닥 30억원) 기준이 너무 낮아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시가총액과 매출액 기준을 못 맞춰 주식 시장에서 퇴출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주가가 낮아도,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해 매출이 없어도 주식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른바 ‘좀비 기업’이 많았다. 이들은 국내 증시가 저평가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금융당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장폐지 기준이 되는 시가총액과 매출액 기준을 크게 높이기로 했다. 우선 시가총액은 내년부터 2028년까지 3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높인다. 코스피 기준은 5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현재보다 최대 10배까지 올라간다. 코스닥 기준은 4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상향 조정된다. 금융당국 계획대로라면 2028년 1월부터는 코스피에서 시가총액 500억원 미만의 기업의 주식은 거래할 수 없다. 상장폐지 매출 기준도 시가총액처럼 높아진다. 코스피는 50억→300억원으로, 코스닥은 30억→100억원으로 각각 올라간다. 단기간에 매출을 끌어올리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2029년까지 단계적으로 요건을 강화하기로 했다.
상장폐지 절차도 축소해 속도를 높인다. 현재는 상장폐지 요건에 해당하더라도 코스피에선 두 번의 심의와 최대 4년의 개선 기간을, 코스닥에선 3번의 심의와 최대 2년의 개선 기간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번 개편을 통해 코스피에서의 개선 기간은 최대 4년에서 2년으로 줄어든다. 코스닥의 경우 3심제를 2심제로 축소하고 개선 기간도 2년에서 1년6개월로 단축한다.
감사 의견이 2회 연속 적정에서 미달(한정·부적정·의견거절 등)한 기업은 올해 하반기부터 개선 기간 없이 즉시 상장폐지한다. 현재는 다다음 사업연도 감사 의견이 나올 때까지 개선 기간을 줬다. 감사 의견 미달로 최근 5년간 상장폐지한 사례는 236건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제도 개선이 이뤄지면 건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예외적으로 회생·워크아웃(기업 재무 개선) 기업에 대해서는 추가 개선 기간을 부여한다.
199개사 상장폐지 대상…코스피 8%, 코스닥 7%
시장 충격은 클 것으로 보인다. 그간 요식적으로 운영되던 상장폐지 제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면, 증시에서 사라지는 기업이 본격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라서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현재 기준으로 코스피는 62개사, 코스닥은 137개사를 시가총액이나 매출 기준 요건 미달로 퇴출할 수 있다. 코스피에선 전체의 약 8%, 코스닥에선 7%의 기업이 사라지는 것이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의 화면에 이날 거래를 마감한 코스피,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좀비 기업이 사라질수록 전체 주가에는 긍정적이다. 추려진 알짜 기업에만 투자금이 모일 수 있어서다. 다만, 상장폐지 요건이 깐깐해지면 당장 실적을 내기 어려운 중소기업이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어려워진다. 갑작스러운 상장폐지로 투자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금융당국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매출이 낮더라도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은 요건에 미달해도 상장 기업 지위를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최소 시가총액 요건(코스피 1000억원 이상, 코스닥 600억원 이상) 조건은 갖춰야 한다. 또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 상장폐지 이후에도 금융투자협회 비상장 거래 플랫폼(K-OTC)을 이용해 거래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상장 직후 주식을 바로 내다 파는 이른바 ‘IPO(기업공개) 단타’도 막는다. 우선 금융당국은 일정 기간 주식을 팔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기관투자자에게 기관 공모주 물량 40% 이상을 배정하도록 제도를 개선한다. 40%에 미달하면 주관사가 공모 물량 1%(상한금액 30억원)를 취득해 6개월간 보유하도록 하는 페널티(벌칙)를 주기로 했다. 또 의무보유 기간에 따라 상장 가점도 부과한다. 기업이 IPO를 할 때 합리적인 주가가 책정될 수 있도록 수요 예측 기준도 높일 예정이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효율적이고 투자자 보호가 이루어지는 시장구조를 만들기 위해 ‘주식시장 체계 개편 방향’을 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남준 기자 kim.nam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