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창고까지 눈독…몸집 키운 박물관·미술관들 “수장고를 확보하라”

개방형 수장고로 설계 운영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1층 개방형 수장고에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중앙포토

개방형 수장고로 설계 운영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1층 개방형 수장고에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중앙포토

 
최근 경북 경산시에 위치한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에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종로구)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지하 2층에 현재 비어 있는 6292.4㎡(약 1900평) 규모의 콘크리트 벙커를 꼼꼼히 둘러봤다. 과거에 화폐 생산 및 보관 시설로 사용된 이곳은 화폐 수요가 줄면서 현재 공실 상태다.

이들이 들른 이유는 소장품 보관 가능성을 따지기 위해서다. 미술관 관계자는 “돈다발을 보관하던 곳이니만큼 보안 시스템은 물론 항온·항습 기능도 갖췄다는 점에서 수장고 후보로 놓고 상반기 내 연구용역을 발주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폐공사 측도 유휴시설 활용 차원에서 적극 구애하는 모양새다.

한국의 경제·문화 성장과 함께 몸집을 키워온 국공립 미술관·박물관들이 ‘수장고 부족’ 몸살을 앓고 있다. 설립 연도가 오래되면서 자연스레 포화율이 높아진 데다 2021년 ‘이건희 컬렉션’ 기증 이후 각계 기증이 활발해진 점, 국내외 전시 교류 증대로 인한 임시 거치 시설 수요 등이 배경으로 꼽힌다. 부족한 시설을 증·개축하려다 되레 일시적인 과부하가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 2018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도자기 수장고에서 박물관 직원이 재질별로 보관된 유물을 살펴보는 모습. 중앙포토

지난 2018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도자기 수장고에서 박물관 직원이 재질별로 보관된 유물을 살펴보는 모습. 중앙포토

 
지난 1일 화마에 휩싸였던 국립한글박물관(서울 용산구)은 화재 복구 기간에 수장품을 안전하게 관리할 공간 모색에 고심하고 있다. 2014년 개관해 ‘정조 한글어찰첩’(보물) 등 8만9000여점을 소장한 이곳은 시설 증축 공사 중에 벌어진 화재로 하마터면 문화유산 피해를 입을 뻔했다. 이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 수장고를 일부 임차해 써온 한글박물관 측은 인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유물 전체를 옮기려 준비 중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일단 분류·포장을 압축적으로 하고 효율적인 수납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중앙박물관의 수장률(89.2%)도 턱밑까지 차올랐단 사실. 2021년 인왕제색도(국보)를 포함한 이건희 컬렉션 9797건 2만1600여점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 전해 87.9%였던 수장률이 96.2%로 치솟았다. 그나마 22개 수장고 가운데 4개를 2019~2020년에 중층화한 덕에 수용 가능했다. 박물관 유물관리부의 권혁산 학예연구관은 “2022~23년에 걸쳐 수장체계를 정비하고 격납 효율화에 나서 포화율을 다시 낮춘 상태라 한글박물관 유물 보관도 그럭저럭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박물관 직원이 수장고에 보관된 유물을 공개하고 있다.  조선왕실 전문 박물관인 국립고궁박물관은 8만8000여 점의 왕실 유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유물들은 재질에 따라 적정 온·습도가 유지되는 19개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뉴스1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박물관 직원이 수장고에 보관된 유물을 공개하고 있다. 조선왕실 전문 박물관인 국립고궁박물관은 8만8000여 점의 왕실 유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유물들은 재질에 따라 적정 온·습도가 유지되는 19개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뉴스1

이건희 컬렉션 1488점(최종 등록 1494점)을 기증받은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그해 수장률이 90%를 넘기면서 국정감사 때 지적까지 당했다. 이후에도 개인 소장가나 작가 유족 등의 기증이 눈에 띄게 늘어 서울관(수장률 92%)은 물론 과천관(93%)과 청주관(96%) 모두 포화상태다.

소장품자료과의 박미화 과장은 “매년 기증·구입으로 수백점씩 늘어나는데다 최근엔 설치미술 등 작품 부피도 커지면서 수장고 현황이 아슬아슬하다”고 토로했다. 대전 선화동에 위치한 옛 충남도청사에 대전 분관을 추진(2028년 개관 목표)하는 덴 이 같은 배경도 한몫했다. 미술관 측은 “이리저리 분산시키다보면 물류·관리 비용이 더 들 수 있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부산에선 리모델링 공사 중인 부산시립미술관(수장률 99%)을 비롯해 부산근현대역사관(80%), 부산시립박물관(77%) 등이 함께 사용할 대규모 통합 수장고가 추진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의 자유무역지역(FTZ) 내 미술품 전문 수장고 ‘더프리포트’에 부산시립미술관 수장품이 보관돼 있다. 미술관 측의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수장품 3500여점 전체가 2024년 7월 1일부터 2025년 10월 31일까지 이곳에 보관된다. 사진 더프리포트

인천국제공항의 자유무역지역(FTZ) 내 미술품 전문 수장고 ‘더프리포트’에 부산시립미술관 수장품이 보관돼 있다. 미술관 측의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수장품 3500여점 전체가 2024년 7월 1일부터 2025년 10월 31일까지 이곳에 보관된다. 사진 더프리포트

이렇다보니 전문 수장시설을 틈새시장으로 개척한 사업도 생겨났다. 지난해 7월 인천국제공항의 자유무역지역(FTZ) 안에 8909m²(약 2970평) 규모로 들어선 미술품 전문 수장고 ‘더프리포트’는 개인·법인·미술관·갤러리들이 미술품이나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게 임차해준다. 공사 중인 부산시립미술관 소장품 3500여점 전체를 보관하고 있고 아트페어 등을 위해 오고가는 예술품도 대상이다. 전윤수 대표는 “영국 프리즈(FRIEZE)의 사이먼 폭스 CEO가 최근 방문해 오는 9월 프리즈서울과 관련한 계약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박물관학 연구자인 이화여대 오영찬 교수는 “국·공립 시설의 경우 증축·신설을 서두르기보다 수납체계의 복층화, 국·공립 유휴시설 활용 등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상훈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수장품 성격에 따라 저비용고효율로 보관할 수도, 적극적인 시설 투자가 필요할 수도 있다”면서 “후자의 경우 아예 파주 민속박물관처럼 개방형 수장고로 추진해 대중적인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경기 파주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의 모습. 개방형 수장고로 관람객이 수장고 내부를 체험할 수 있는 '열린 수장고'(7개)와 창문을 통한 '보이는 수장고'(3개)로 구성돼 있다. 중앙포토

경기 파주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의 모습. 개방형 수장고로 관람객이 수장고 내부를 체험할 수 있는 '열린 수장고'(7개)와 창문을 통한 '보이는 수장고'(3개)로 구성돼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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