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이 이란, 북한 등 불량 국가들을 상대로 써온 강압외교(coercive diplomacy)의 칼끝을 끝내 우방에 돌렸다. 3일(현지시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를 전면 중단한 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확장억제에 의존하는 동맹 한국 역시 언제든 트럼프식 강압외교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국의 방위비 분담액이 충분치 않다고 여길 경우 당장 전략자산 전개를 중단하거나 주한미군까지 손대려 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지도자들이 ‘평화를 위한 성실한 약속’(a good-faith commitment to peace)을 입증할 때까지” 대우크라이나 원조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재개 조건 자체가 트럼프의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모호한 기준인 셈이다. 

이처럼 트럼프가 자의적 판단에 따라 대외 군사 원조를 언제든 맺고 끊을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의 동맹·우방에는 적신호라는 지적이다. 한국을 꾸준히 '부자 나라', '머니머신(money machine)'이라고 부르는 트럼프가 한국을 향해서도 주한미군 주둔이나 전략자산 전개에 대해 1기 때보다 더 강력한 청구서를 내밀 수 있다는 뜻이어서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향후 방위비 분담금 등 협상 추이에 따라 한반도 전략자산 전개 중단은 충분히 예상할 만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예컨대 3축 체계 중 하나인 대량응징보복의 핵심 자산인 초고위력 탄도미사일 현무 등의 능력을 크게 끌어올리는 등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 중단을 염두에 두고 자체적으로 대북 억제력을 유지할 방안을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트럼프는 1기 때 11차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을 하며 새로운 항목까지 만들어 전략자산 전개 비용이나 병력 순환배치 비용을 한국에 떠넘기는 데 집착했다. 한국이 기존 항목을 유지하겠다고 버티자 미 측은 아예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전례 없는 상황을 연출했고, 미 측 협상 대표가 별도로 기자회견을 여는 등 장외 여론전까지 벌이며 한국을 압박했다.(2019년 11월) 결국 11차 SMA는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야 타결됐다.


앞서 한·미는 바이든 행정부 임기 막바지인 지난해 10월 2030년까지 적용되는 12차 SMA를 이미 타결했지만, 트럼프는 이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지난달 28일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 파행부터 군사 원조 중단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미국이 동맹과 우방을 언제든 방기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우리가 없으면 당신은 아무런 카드가 없다"며 삿대질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북한을 비롯한 반자유주의 국가들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으며, 한국에는 그 자체로 대북 억지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트럼프가 실리를 위해서라면 동맹과 우방의 안보도 얼마든지 수단화할 수 있으며, 북한을 포함한 이른바 '적국'에 유리한 협상도 타결한다는 신호일 수 있어서다. 

정대진 교수는 “가치보다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는 트럼프 협상 방식이 북한ㆍ러시아 등 권위주의 진영에 유리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의도치 않은 풍선효과인 셈”이라고 말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가 한반도 문제를 한국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풀어나갈 거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한·미·일 협력 등 기존의 외교 공식도 트럼프 시대에는 반드시 유지될 거라고 담보할 수 없는 만큼 가변적 상황을 전제로 대응방안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가 1기 때 실제 철수를 검토했던 주한미군을 또 건드리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향후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전략자산 전개에 따른 비용 청구, 주한미군 감축 문제 등이 거론될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여기에 북·미 협상의 진행 상황에 맞춰 미국의 요구 사항이 더해진다면 한국으로선 난처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트럼프 1기 당시 미국은 2018년 남북 간 9·19 군사합의 체결 등 유화 분위기 속에서 같은 해 10월 로널드레이건함의 제주 관함식 참가를 마지막으로 전략자산 전개를 중단한 적이 있다. 북·미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연합훈련 및 연습도 축소되거나 유예됐다.

다만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상황을 한반도에 즉자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다. 대중 견제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이 미국에 지니는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이나 유엔사를 중국이 극도로 경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주한미군은 군사작전적 측면에서 주일미군 및 괌 기지 운용과도 맞물려 있는 문제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장에 투입된 미국의 자산을 하루빨리 회수해 대중국 견제, 즉 아시아 지역에 쓰고자 한다"며 "이 과정에서 한·미 동맹, 한·미·일 협력은 중요한 전략 기제이기 때문에 그 근본을 훼손하는 자충수는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트럼프는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동맹 경시 수위가 높지만, 그럼에도 한국 같은 핵심 동맹과 단절하는 선택을 하진 않을 것"이라며 "한국은 정상외교가 멈춰있는 상황을 활용해 시간을 벌면서 트럼프의 전략을 지켜보는 '딜레이 작전'으로 가는 게 적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