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스 카프스킨으로 만든 에르메스의 버킨백. ⓒJack Davison
180년 전통, 장인정신의 뿌리
에르메스의 역사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ès)가 프랑스 파리에서 마구(馬具) 제작 공방을 연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에르메스는 최고급 마구를 제작하며 말의 움직임을 고려한 섬세한 기술력과 디자인 감각으로 명성을 쌓았다. 20세기 초 자동차 시대가 도래해 마구 산업이 쇠퇴하자, 에르메스는 이를 계기로 가죽 가방, 액세서리, 의류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장인의 손길로 완성한 최고의 품질’이란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에르메스의 가죽 제품은 지금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지 않으며, 숙련된 장인이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정성 들여 만드는 제작 방식을 유지한다.

에르메스 장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 ⓒCoppi Barbieri
에르메스의 장인정신은 제품 제작의 모든 과정에서 철저히 구현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메띠에(Métiers)다. 프랑스어 메띠에는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식으로 풀면 ‘전문 분야’ 정도가 되겠다. 에르메스는 이 메띠에를 중심으로 제품을 제작하고 혁신을 이끄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가죽 제품이다. 장인이 보유한 전문 기술을 기반으로 브랜드가 가진 다양한 상징물에 창의성을 더한 가죽 제품이 새로 태어나는데, 이들의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작업 방식은 에르메스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에르메스의 제품을 완성시키는 하나하나의 요소들. 모두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는 디테일이다. ⓒCoppi Barbieri
가죽부터 시작하는 '최고'를 찾는 여정
가죽 제품의 품질은 8할이 가죽에서 나온다. 에르메스는 최상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풀-그레인(full-grain) 가죽만을 사용하는데, 이는 가죽의 자연스러운 주름과 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멋스러워지는 특징을 지닌다. 그뿐만 아니라 가죽의 염색·마감 과정도 전통적인 태닝 기법을 활용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죽 중 하나인 복스(Box)는 깊이감 있는 색상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만지면 섬세한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튀어 오르는 특성을 갖는다. 또 다른 가죽 바레니아 카프스킨(Barénia calfskin)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색이 깊어지는 파티나(patina·오래된 금속이나 물건 표면에 생기는 고색)가 형성돼 고유의 멋을 더한다.

형형색색의 풀-그레인 가죽을 한 장씩 살펴보고 있는 에르메스의 장인. ⓒChris Payne

스티칭은 완벽한 가죽을 연결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Chris Payne

린넨 실을 양쪽에서 동시에 꿰매는 새들 스티칭. ⓒChris Payne
공들여 준비한 가죽은 장인의 손길을 만나 제 모습을 찾는다. 가죽을 꿰매는 새들 스티칭(Saddle Stitch)은 두 개의 바늘과 밀랍 처리된 린넨 실을 이용한 수작업 방식으로,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또한 제품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정리하는 버니싱(Burnishing), 자물쇠와 버클의 정교한 금속 공예 등은 장인의 손길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버클 등 금속 장식을 세심하게 가방 가죽에 부착하고 있는 장인의 모습. ⓒChris Payne
장인의 책임 담은 ‘1인 1가방’ 원칙
가방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에르메스는 한 명의 장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제품을 제작하는 ‘1인 1가방’ 원칙을 고수한다. 장인 한 명이 가방 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며,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한 개의 제품을 완성하기 위해선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대표 가방 중 하나인 켈리 백을 만드는 데는 약 15~20시간이 소요되는데, 장인은 자신이 만든 가방에 고유의 스탬프를 새겨 책임감을 갖는다. 장인이 제품의 시작이자 끝이기에, 에르메스는 프랑스 전역에 20개 이상의 공방을 운영하며 4000명 이상의 장인과 협업하고 있다. 이곳에선 전통적인 제작 방식이 전수되고, 신입 장인은 18개월 이상의 훈련 기간을 거쳐야만 독립적으로 제품을 제작할 수 있다.

복스 카프스킨 소재의 켈리 백. ⓒJack Davison
가방 중에서 장인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제품으로는 앞서 말한 켈리 백과 영화배우 제인 버킨을 위해 탄생한 버킨 백을 꼽을 수밖에 없다. 이 가방들은 정교한 바느질과 완벽한 마감으로 유명하며, 각 제품이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다뤄진다. 또한 1923년 탄생한 볼리드 백은 세계 최초로 지퍼를 장착한 가방으로, 혁신과 전통이 공존하는 에르메스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이들의 가죽 공예 기술은 가방 외 시계, 벨트, 실크 스카프 등 다양한 제품군에서도 빛을 발한다. 특히 실크 스카프는 하나의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 평균 600시간이 소요된다. 고안된 디자인은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그려지는데, 이는 최대 48개의 색상을 한장의 스카프에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버틀러 카프스킨 소재의 룰리스 백. ⓒJack Davison

타델락트 카프스킨 소재의 베루 백. ⓒJack Davison
세월 지나도 변치 않는 가치 추구
전통적인 제작 방식을 고수한다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2015년 시작한 애플과의 협업은 에르메스의 혁신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승마 기수가 착용하는 조끼의 컬러 블록에서 영감 받은 가죽으로 애플 워치 스트랩에서 에어팟 케이스까지 협업 제품을 선보였다. 이는 아름다운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한 최첨단의 기술, 고품질 소재의 사용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한 협업이었다.

2015년 첫 선을 보인 애플 워치 에르메스. 협업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 애플.
이들이 혁신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프로젝트는 쁘띠 아쉬(Petit H). 생산 과정에서 남은 가죽·실크·금속 등 재료를 재활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실험이다. 예를 들어 에르메스 아카이브에 보존돼 있던 1960년대 말 안장 부품인 새들 트리는 쁘띠 아쉬 공방에서 썰매, 의자, 기타, 바구니, 꽃병으로 변신했다. 기존 제품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인과 디자이너가 협업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방식이다.
에르메스는 ‘오래 사용할수록 더욱 빛나는 제품’을 만든다. 이를 위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제품을 기획한다. 또한 유행을 따르기보다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디자인을 유지한다. 대부분의 제품은 수선이 가능하도록 설계돼 있어 장인의 손길을 거쳐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설립자 티에리 에르메스의 5대손이자 약 30년간 에르메스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장 루이 뒤마는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란 말을 남겼다. 그의 말처럼 에르메스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만들겠다는 철학을 지키며 꾸준히 진화해왔다. 이런 점이 바로 에르메스를 단순한 럭셔리 브랜드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 그리고 장인정신이 깃든 브랜드로 만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