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춘절 후 베이징 자택의 후더화. 뒤로 “몸은 가장 아래에 머물고, 뜻은 가장 위에 자리한다(身居最下游 志在最高層)”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친필이 보인다. 왕밍위안 위챗 캡처
고위간부 자제인 홍이대(紅二代) 출신인 후더화는 지난 2012년 시진핑 정권이 출범한 18차 당 대회 이후에도 과감한 시국 발언으로 주목을 받아왔다고 홍콩 명보가 1일 보도했다.
후더화는 생전에 당내 개혁파 원로인 리루이(李銳·1917~2019) 전 마오쩌둥 비서, 두다오정(杜導正·102) 신문출판총서 초대 서장 등과 교류하며 줄곧 체제 개혁을 주장했다. 지난 2013년에는 중국신순사 인터뷰에서 “개혁에는 큰 지혜, 큰 기개, 큰 포용, 큰 자비가 필요하다”며 “30년 전의 개혁 성과에 안주할 수 없으며, 계속 혁신하고 새로운 사상을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학을 전공해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센터 부주임을 역임한 후더화는 문화대혁명 당시 부친과 함께 고초를 겪었다.
후더화의 부친인 후야오방은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로 과감한 개혁개방을 주도한 대표적인 개혁파 지도자였다. 1987년 당내 보수파의 핍박으로 총서기직에서 물러난 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이후 그를 지지하는 대학생들의 추모 집회가 대규모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으며 끝내 6월 4일 천안문 유혈진압으로 마무리됐다.
후더화는 지난 2013년 『염황춘추』 잡지사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최고지도자의 시각을 비판했다. 그는 “시 주석의 연설을 읽고 무거운 마음을 느꼈다”라며 “왜 구 소련의 붕괴를 비통해하나”라고 직격했다. 이어 “반우파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그의 발언은 당중앙의 역린을 건드렸고 이후 외부 인터뷰가 모두 금지됐다.
2016년 당국이 개혁파의 마지막 보루였던 『염황춘추』 편집부 개편을 단행할 당시 후더화는 몸싸움을 벌이며 막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명보가 전했다.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을 나흘 앞둔 지난 2015년 11월 16일 후난성 류양시에 있는 후야오방의 생가 앞에서 추모객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중앙포토
후더화는 만년에 부친 후야오방의 일생을 연구해 『내 마음속의 후야오방』과 전기를 펴냈다. 그는 후야오방이 어떻게 혁명 노선에서 점차 멀어졌으며, 개혁 문제에서 덩샤오핑과 점차 멀어진 원인에 천착했다.
중국 SNS에는 지식인들의 추모글이 이어졌다. 왕밍위안(王明遠) 베이징시 개혁 및 발전연구회 연구원은 “더화 선생은 부친의 성실함, 진솔함, 선량함을 물려받았다”라며 “그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종업원·운전사·경비원에게도 항상 예를 갖췄고 연락처를 요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염황춘추』의 전 편집인 쉬칭취안(徐慶全)은 31일 “어젯밤 더화 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믿어지지 않고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라며 고인의 사진을 공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