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 의성체육관에 마련된 산불 이재민 임시대피소 모습. 김정석 기자
1일 오전 임시대피소에서 만난 이씨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한창 마늘 농사 준비에 바쁠 시기지만, 지금 이씨는 무엇을 할지 몰라 그냥 멍하니 있는 때가 많다고 한다.
건강 급격 악화…악몽에 잠도 못자

1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 의성체육관에 마련된 산불 이재민 임시대피소 모습. 김정석 기자
극심한 스트레스와 부족한 수면 시간 등 여러 이유로 이씨의 건강은 크게 악화됐다. 최고혈압이 220㎜Hg까지 치솟을 정도로 혈압이 높아졌다. 지병인 당뇨병과 대장암 수술 후유증도 심해졌다. 이씨는 “당뇨병 약을 1년치 받아놓고 매일 먹는데 급하게 산불을 피해 오느라 모두 놓고 나왔다. 오늘 아들이 서울에 약을 받으러 갔다”고 했다.
안동시 임하면에 사는 신모(60)씨는 다행히 집이 불타지는 않았지만 산불 충격으로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신씨는 “대피한 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려고 했는데 갑자기 현관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났다”며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 같지만 벌써 치매가 찾아온 것 아닌지 불안하다”고 전했다.
지난 22~28일 경북 북부지역을 휩쓴 산불의 피해자는 60대 이상 고령층에 집중돼 있다. 의성과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지역의 고령층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아서다. 2023년 기준 전국평균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18.6%인 데 반해 경북은 23.8%로 5.2%포인트 더 높다. 특히 의성의 경우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45.5%, 청송은 41.6%, 영양은 41.1%에 달한다.

경북 북부지역을 휩쓴 산불이 진화된 지 이틀이 지난달 30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에 위치한 주택이 산불로 무너져 지붕만 남아 있다. 김정석 기자
급격한 환경변화로 섬망 올 수도
정경애 국립부곡병원 영남권트라우마센터 팀장은 “이재민 대피소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대부분 산불 당시 겪었던 경험이 자꾸 떠올라 괴롭고 제때 대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호소한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도 높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느냐’는 울화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심리지원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김정석 기자
정 팀장은 “특히 노인의 경우 평생 쓰던 세탁기 사용법도 잊어버리거나 가족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등 극심한 인지 능력 저하를 겪기도 한다”며 “피해 주민들의 괴로움과 트라우마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전문적인 심리상담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경북도는 심리적 충격을 받은 주민들의 안정과 회복을 위한 지원에도 힘을 쏟고 있다. 특히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집이 전소돼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심리적 안정과 회복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1일 오전 현재 2425건의 심리치료지원이 이뤄졌다.
또 긴급 심리지원 핫라인(1577-0199)을 운영해 24시간 상담할 수 있게 하고 찾아가는 심리지원을 통해 산불 피해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전문적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