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에 월드컵 트로피가?…가짜도 진짜라 우기는 트럼프 취향

 백악관 집무실(오벌 오피스)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뒤에 FIFA 월드컵 트로피 모조품을 뒀고, 책상 옆에는 로널드 레이건(아래)을 비롯한 전임자들의 초상화를 걸었다. UPI=연합뉴스

백악관 집무실(오벌 오피스)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뒤에 FIFA 월드컵 트로피 모조품을 뒀고, 책상 옆에는 로널드 레이건(아래)을 비롯한 전임자들의 초상화를 걸었다. UPI=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백악관 집무실(Oval Office)이 공개된 올 초 전세계 축구 팬들의 눈길은 그의 책상 뒤에 머물렀다. 가족사진들 사이에 황금색 월드컵 트로피가 놓여 있었다. 미국이 한 번도 월드컵에서 우승한 적이 없는데, 왜 대통령 집무실에 트로피가 있을까. 영국 인디펜던트의 질의에 국제축구연맹(FIFA) 대변인은 “트럼프가 가진 건 진품이 아니”라고 답했다.

오벌 오피스는 미 대통령의 이미지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다. 75.4㎡(약 23평)의 타원형 사무실에서 세계를 흔드는 중요한 결정과 만남이 이어진다. 새 대통령 취임 때마다 인테리어에 조금씩 변화를 주는데, 대통령의 예술적 취향뿐 아니라 국정 철학을 엿보는 가늠자로 주목받는다. ‘트럼프 쇼룸’이라 할 수 있는 2기 오벌 오피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황금’과 ‘가짜’다. 벽난로에 금장식을 두르고 문 앞의 로코코 풍 거울, TV 리모컨까지 금박을 물렸다. “대통령이라기보다 왕 같다. 아주 기이하다”(전직 백악관 관계자의 CNN 인터뷰)는 촌평도 나왔을 정도다.

번쩍이는 집무실은 ‘하늘의 베르사유 궁전’이라 불리는 뉴욕의 트럼프 타워 26층 펜트하우스와도 닮았다. 여기엔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의 모조품이 빼곡하고, 르누아르의 ‘두 자매’ 모작도 있는 걸로 알려졌다.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며 가짜 뉴스를 좋아하듯, ‘부와 성공의 과시’라는 목적에만 충실하면 진품·원본 여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르누아르 만이 아니다. 트럼프의 인상파 사랑은 지극하다. 1기(2017~21) 때 구겐하임 미술관에 반 고흐 풍경화를 빌려달라고도 요청했다. 구겐하임 측은 이를 거절하며 “대신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18K 황금 변기 ‘아메리카’를 설치해 주겠다”고 했다. 금장식이나 좋아하는 속물이라고 짐짓 비꼰 거다.

오바마는 2011년 노먼록웰의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문제’를 걸고 주인공인 브리지스(가운데)를 초대했다. [사진 백악관 아카이브]

오바마는 2011년 노먼록웰의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문제’를 걸고 주인공인 브리지스(가운데)를 초대했다. [사진 백악관 아카이브]

전임 바이든의 6점 때보다 3배 가까운 20점의 초상화를 빼곡하게 건 벽면도 눈에 띈다. ‘미국의 황금기’를 이끈 전임자들의 모습으로 집무실 벽을 가득 채워 이들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의도다. 금박으로 번쩍이는 벽난로 위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초상화를 걸었다. 오벌 오피스에 워싱턴 초상화가 걸리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다만 이번 것은 크고, 금박 액자로 장식됐으며, 칼을 찬 모습이다. 힘과 권위의 강조다.


가장 독특한 인물은 11대 대통령 제임스 포크(재임 1845~49)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는 2월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에게 전화해 국회의사당에 걸린 포크 초상화와 백악관의 토머스 제퍼슨 초상화를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포크는 임기 4년 동안 미국 영토를 거의 두 배로 늘렸다. 포크처럼, 그는 영토 확장 욕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야 한다”라거나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인수해야 한다”는 식이다.

본래 오벌 오피스의 미술품은 ‘통합의 상징’이었다. 전임 바이든은 트럼프가 첫 임기 때 걸었던 8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초상화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과학자 겸 발명가인 벤저민 프랭클린 초상화를 걸었다. 잭슨 대통령은 미 원주민 대학살에 앞장선 장군 출신이다. 바이든은 또 라틴계 인권 운동가인 세자르 차베스의 흉상을 책상 위에 둠으로써 포용과 다양성을 강조했다.

오바마(재임 2009~2017)는 오벌 오피스에 대통령 초상화는 워싱턴과 링컨 두 점만 걸 정도로 심플한 공간을 유지했다. 대신 휘트니 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두 점을 빌려오는 등 미술품을 늘렸다. ‘미술 정치’에도 적극적이었다. 임기 첫해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청동 흉상을 들였다. 2011년에는 오벌 오피스 앞에 노먼 록웰이 그린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문제’를 걸었다. 1960년 백인만 다닐 수 있던 초등학교에 등교하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루비 브리지스를 그렸다. 오바마는 브리지스를 백악관에 초대하기도 했다.

백악관은 회화만 500점 넘는 자체 미술품 컬렉션을 갖고 있다. 스미스소니언 등 국립미술관이나 타 기관의 컬렉션을 빌려 오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1명이 대통령실에 순환 근무를 한다. 주요 장소에 미술품을 대여해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