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왕족 출신"…이정후는 어떻게 'SF의 태풍'이 됐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바람의 손자(Grandson of the Wind)'입니다."  

이정후(27)는 2023년 12월 메이저리그(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입단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샌프란시스코 구단과 역대 한국인 선수 최고액인 6년 총액 1억1300만 달러(약 1626억원)에 계약한 뒤였다. 그때만 해도 일부 미국 언론은 "아무래도 샌프란시스코가 과도한 돈을 쓴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후 1년 여가 흐른 지금, 부정적인 시선은 자취를 감췄다. 이정후는 지금 샌프란시스코에 진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28일까지 타율(0.324), 득점(22점), 장타율(0.546), OPS(출루율+장타율·0.929), 2루타(11개), 3루타(2개) 모두 팀 내 1위다. 타점(16점)과 출루율(0.383)도 2위에 올라 있고, 10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중 삼진(17개)도 가장 적다. 이날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도 5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MLB닷컴은 "샌프란시스코가 그토록 기다리던 '수퍼스타'를 품에 안은 것 같다"고 썼다. 

 28일(한국시간) 텍사스전 끝내기 승리 뒤 기뻐하는 이정후. AP=연합뉴스

28일(한국시간) 텍사스전 끝내기 승리 뒤 기뻐하는 이정후. AP=연합뉴스

28일(한국시간) 텍사스전에서 빠르고 정확한 송구로 2루에서 주자를 잡아낸 이정후. AP=연합뉴스

28일(한국시간) 텍사스전에서 빠르고 정확한 송구로 2루에서 주자를 잡아낸 이정후. AP=연합뉴스

◇천재 타자

이정후는 천재적인 타자다. 여러 한국인 타자가 빅리그를 거쳐갔지만, 올해의 이정후처럼 빠르게 적응하고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는 없었다. 그는 원래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에 내야수로 지명됐는데, 타격에 집중하려고 입단 직후 외야수로 전향했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었다. 팻 버렐 샌프란시스코 타격코치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정후는 타석에서 무척 편안해 보인다. 공을 매우 잘 보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감각으로 스윙 여부를 결정한다"며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믿으며 스윙하는 모습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감탄했다.  


빈틈이 없다. 이정후는 왼손 타자인데도 올 시즌 왼손 투수 상대 타율(0.351)이 오른손 투수 상대 타율(0.310)보다 높다. MLB 왼손 타자 중 유일하게 뉴욕 양키스 좌완 에이스 카를로스 로돈을 상대로 한 경기 2홈런을 쳤다. 득점권 타율이 0.343으로 시즌 타율을 웃돌고, 주자 2루시 타율은 0.444나 된다. 경기 후반인 7회(0.500)와 8회(0.400)에 특히 강했다. 올 시즌 3번 타자로 기용되면서 장타력도 더 좋아졌다. 벌써 2루타 11개를 때려내 내셔널리그 공동 1위다. '발만 빠른 교타자'라는 초기 평가를 완전히 뒤집는 결과다.  

수비도 안정적이다. 28일 텍사스전에서 조나 하임의 좌중간 안타 타구를 전력질주로 빠르게 낚아챈 뒤 2루로 정확하게 송구해 타자 주자를 아웃시켰다. MLB 사무국이 공식 소셜미디어(SNS)에 이 장면을 소개할 정도로 좋은 수비였다. 빅리그 데뷔 후 아직 실책이 하나도 없다.

타격하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타격하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타격하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타격하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바람의 손자  

이정후에게 천재적인 야구 DNA를 물려준 건 아버지인 이종범(55) KT 위즈 코치다. 이 코치는 현역 시절 '바람의 아들'이라 불린 원조 '야구 천재'였다. 그런 이 코치조차 자신의 별명이 훗날 MLB 무대까지 뻗어나갈 거라는 예상은 못했을 듯하다. 프로 데뷔 전부터 '바람의 손자'로 불린 이정후는 한때 이 별명을 쑥스러워했다. "나이가 좀 어릴 때는 괜찮지만, 나중에 더 커서도 '손자'라고 불리면 조금 민망할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러나 이정후와 사인한 날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그의 KBO리그 기록을 상세히 업로드하며 자랑스럽게 "여기 '바람의 손자'를 만나보시라"고 썼다. MLB닷컴은 이 별명의 기원을 소개하면서 "이정후는 한국 야구의 '왕족'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전설적인 선수였다"며 이 코치의 활약상까지 주목했다. 

이정후를 지켜 본 많은 이가 "그의 진짜 재능은 '멘털'"이라고 증언한다. 실제로 이정후는 "타석에서 한 번도 긴장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아버지의 그늘로 숨어들기는커녕, 더 빛나는 선수로 성장한 비결도 여기에 있다. 그는 과거 한 야구팬이 SNS에 아버지와 자신을 비교하는 악성 댓글을 달자 이런 답변을 남겼다. "혹시 '이종범의 아들'로 태어나서 야구를 해본 경험이 있나. 난 그 부담감을 극복하고 인내하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 코치는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정후가 이제 진짜 어른이 됐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팬들에게 사인해주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팬들에게 사인해주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팬들에게 사인해주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팬들에게 사인해주는 이정후. 로이터=연합뉴스

◇'이정후 구호'와 '후리건'  

샌프란시스코의 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경기장엔 '이정후 구호(chant)'가 울려 퍼진다. 구단이 직접 붙인 애칭이다. 이름에 '후(hoo)'가 들어가는 덕에 관중이 다같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만 해도 거대한 응원 구호처럼 들린다. KBO리그 구단들의 다양한 육성 응원법처럼, 샌프란시스코 팬들에겐 이정후의 이름이 승리의 구호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이정후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주말 홈 경기마다 이정후가 수비하는 외야 중견수 뒤편(142구역)을 이정후 응원 구역, 이른바 '정후 크루(Jung Hoo Crew)'로 운영한다. 이 구역 티켓을 예매하면 이정후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 티셔츠도 준다. 샌프란시스코는 지난 27일 팀이 끝내기 승리를 거두자 이 구역에 있던 팬들이 기뻐하는 장면을 따로 SNS에 올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정후의 스타 파워를 주목하는 모양새다. 지역지 '샌프란시스코 스탠다드'는 최근 "올 시즌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많이 팔린 유니폼은 51번(이정후)이다. 한글 버전 유니폼 판매량은 포함하지도 않은 수치"라며 "주문이 밀려 제작 일정에 차질을 빚을 정도"라고 썼다.

현지 팬클럽도 따로 있다. 이름은 '후리건스(Hoo Lee Gans)'. 광적인 팬을 뜻하는 '훌리건(hooligan)'을 응용한 작명이다. 미국인 팬 카일 스밀리 씨가 팬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이들은 매 경기 이정후의 등번호(51번)와 같은 수량의 티켓을 산다. 이정후가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불꽃 모양의 가발도 쓴다. 

이정후는 "이런 관심과 응원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대우에 걸맞은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며 "특히 내가 좋은 성적을 올려야 앞으로 MLB 진출을 원하는 KBO리그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갈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