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주전쟁', 한없이 씁쓸한 자본의 맛

적인가, 동지인가. 영화 '소주전쟁'은 소주회사 임원(유해진)과 글로벌 투자사 직원(이제훈) 두 주인공의 치열한 기업 인수 전쟁을 그린다. [사진 쇼박스]

적인가, 동지인가. 영화 '소주전쟁'은 소주회사 임원(유해진)과 글로벌 투자사 직원(이제훈) 두 주인공의 치열한 기업 인수 전쟁을 그린다. [사진 쇼박스]

1997년 IMF 당시 벌어진 소주회사 인수 전쟁을 그린 영화 '소주전쟁'. [사진 쇼박스]

1997년 IMF 당시 벌어진 소주회사 인수 전쟁을 그린 영화 '소주전쟁'. [사진 쇼박스]

첫맛은 달고, 끝맛은 쓰다. 
영화 '소주전쟁' (30일 개봉)의 맛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처음의 단맛조차 '소주'라는 단어에서 기인한 착각일 수 있다. '소주' 하면 떠오르는 직장 근처의 풍경을 생각해보라. 퇴근 후 들른 술집에서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다시 어깨동무하고 맥줏집으로 향하고, 같이 '으쌰으쌰' 해보자고 등을 두드리며 나누는 사람들. 이 영화의 주인공들도 그랬다. 그런데 순진하게 그런 시간을 진심으로 여겼다면 그 사람이 지는 거다. 

영화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대한민국 국민 소주가 무너졌다'라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소주를 만드는 회사 국보가 유동성 위기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과정을 그린 것. 실제로 영화는 1997년 부도가 난 뒤 골드만삭스에 의해 2005년 매각된 진로소주 인수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두 주인공은 회사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국보의 재무이사 종록(유해진)과 이 위기를 이용해 국보의 경영권을 인수하려는 글로벌 투자 컨설팅 기업 솔퀸의 인범(이제훈)이다. 한국 최고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MBA 출신인 인범에게 회사는 그저 '돈 버는 곳'이다. 그런 그의 눈에 종록은 낯설고 이상할 수밖에 없다. 인간성 좋지만 회장(손현주)에게 충성밖에 모르고, 낮이나 밤이나 회사 생각만 하며 사는 인간이라니. 

'소주'라는 소재 자체가 서민들의 애환을 연상시키지만, 영화는 경영권 인수를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 자체에 방점을 찍었다.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회사를 파산 위기에 빠뜨려 놓고도 철저하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보그룹 회장,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 구영모(최영준), 성과와 이익을 우선시하는 솔퀸의 홍콩 본부장 고든(바이런 만) 등이 그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전개도 탄탄한 편이지만, 캐릭터 소화에 있어서 기본 이상을 하는 배우들이 영화에 생생한 힘을 불어넣었다. 유해진은 물 흐르는 듯한 연기로 회사에 삶을 바친 종록을 자연스럽게 연기했고, 손현주는 충성하는 임원을 종부리듯 다그치며 자기 안위에만 눈이 시뻘건 회장 역할을 더할 수 없이 소화해냈다. 할리우드 영화 '빅쇼트', '스카이스크래퍼' 등에 출연한 바이런 만은 자기 목표에 충실한 캐릭터로 영화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법무법인 대표 역할을 맡은 최영준, 국보와 솔퀸 사이에서 애매한 포지션을 지킨 인범 역할 이제훈의 연기도 빛났다.  


선진 금융기술 vs 모럴 해저드 

'소주전쟁'의 원래 제목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였다고 한다. '모럴 해저드'는 과거 진로와 골드만 삭스 사이의 법정 싸움이 한창일 때 실제 이슈가 된 바 있다. 투자사도, 기업 오너도 도덕성이 무너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목을 '소주전쟁'으로 정한 영화는 어느 한 편을 들기보다는, 한쪽에선 '선진 금융 기술'이라 부르고, 반대편에선 그것을 '모럴 해저드'라고 주장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소주'는 한국 서민들의 애환을 상징하지만, '소주전쟁'은 낭만적일 수 없다. 살벌한 전쟁 그 자체다. 당시 벌어졌던 이들을 30년 가까이 시간 지나서 돌아보니, 당시 직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대충 '낭만'이란 단어로 포장했던 시대의 허술함이 더 분명하게 보여 씁쓸해진다. 30년 전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사법부의 모럴해저드를 다룬 대목도 쓴맛을 한 스푼 더한다.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소주전쟁'은 소주 회사 인수전을 소재로 한국 사회의 여러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사진 쇼박스]

'소주전쟁'은 소주 회사 인수전을 소재로 한국 사회의 여러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사진 쇼박스]

영화 '소주전쟁'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사진 쇼박스]

영화 '소주전쟁'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사진 쇼박스]

29일 서울 용산 CGV에서 시사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영화배우 이제훈은 이 영화를 가리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말했다. 실제로 영화는 표종록과 최인범, 두 캐릭터의 대립을 통해 삶에서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를 묻는다. 인범은 종록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세요?"라고 묻고, 종록은 "회사가 힘들면 내가 힘들잖아"라고 답했다. 그런 그가 회장에게는 "몸으로 때우는 멍청한 **" "출근하지 마, 멍청한 **"라는 욕을 듣는다. 어쨌거나 정 많고, 소주 좋아하고, 회사밖에 모르고 사는 종록의 삶은 과거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소주전쟁' 뒤에 '시나리오 다툼' 

안타깝게도 '소주전쟁'은 당초 연출을 맡았던 최윤진 감독과 제작사가 대립하는 우여곡절 끝에 감독 이름 없이 개봉했다. 제작사 더램프 측과 감독 간에 감독 계약 해촉을 놓고 법원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더램프 측은 29일 보도자료를 통해 "최 감독과 계약을 맺고 영화를 제작하던 도중, 최 감독의 시나리오와 박현우 신인 작가가 과거에 저술했던 시나리오 사이의 높은 유사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후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이 진행한 감정에 따라 제작사 측은 '소주전쟁'이 박현우 작가의 시나리오를 수정해 만들어진 것으로 판정하고, 박 작가를 원작자이자 제1 각본작가, 최 감독을 제2 각본작가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 감독에게는 해촉 전까지 촬영 현장에서의 기여도를 감안해 ‘현장 연출’ 크레딧을 부여했으나, 감독은 해고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9일 열린 시사회에는 배우들만 참석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람객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현실에서 벌어진 '소주전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더 치열했던 현실이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