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의 어느 날, 요시카와 나기(吉川 凪)의 인생은 이 한줄을 번역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20권에 달하는 박경리의 대하 역사소설『토지』완역이란 긴 여정이 시작됐다. 경남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의 딸 최서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만주, 블라디보스토까지 펼쳐지는 거대한 서사에 몰두한 시간만 무려 9년. 지난 10월 마지막 권을 완성한 그를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의 한국 서적 전문점인 책거리에서 만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 『토지』가 외국어로 완역된 건 처음있는 일이다. 탈고 소감을 묻자 그는 “드디어 해방됐다”며 살포시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김승복 쿠온출판사 대표의 집요한 부탁에 마음이 움직였다. “혼자선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과 공동 번역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10년이란 사이에 내가 병들게 되면 완역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이 번역가 시미즈 치사코(淸水知佐子)였다. 1권은 그가, 2권은 시미즈가 이어받는 형태로 번역에 들어갔다. 번역가끼리는 물론, 교정자와 편집자까지 완역본 출간에 매달린 많은 사람들이 용어와 표기, 번역문을 볼 수 있도록 공유하는 작업 형태로 2인3각 이어달리기를 하듯 9년을 이어갔다.
일본어판 『토지』를 위해 그가 가장 신경 쓴 건 전달력. 역주를 붙여가며 첫권 번역을 시작했다. 고민도 많았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시대상을 이해하려 조사에 나섰는데, 정작 소설에 묘사된 일제 강점기 시절 농촌 생활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예컨대, 당시 어떤 짚신을 신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방언과 속담, 수많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어떻게 전할지도 숙제였다. 고심 끝에 그는 원칙을 정했다. ‘가능한 번역은 간결하게 한다.’ 책 뒤편엔 당시 생활상을 일본인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당시 사람들의 외출복, 평상복 차림을 그림으로 소개했다.
그는 한국 문학과 인연이 깊다. 1995년 한국에서 열린 한 문학 학교에서 시인 신경림을 만나 시를 공부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일본에 돌아온 어느 날 ‘스승’ 신경림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원 공부를 해보라”는 거였다.
그렇게 그는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근대 문학을 공부하고, 정지용의 시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땄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그가 선택한 건 번역이었다. “돈벌이는 안 되지만 그간 공부해온 것과 가장 가까운 일”이란 생각에서였다.
이후로는 한국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일을 담당했다. 신경림이 일본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郎)와 시를 주고받은 뒤 이를 엮은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도 그의 손을 거쳤다. 김영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으론 일본번역대상을 받기도 했다. 일본어 번역판에 한국 농촌 마을의 풍경, 숲 풍경이 원작의 느낌대로 군더더기 없이 정겹게 묘사돼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