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캐스팅보트’인 국민연금이 최윤범 회장 측이 제안한 집중투표제 도입에 찬성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오는 23일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에서 MBK파트너스·영풍 측의 이사회 과반 장악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지분율 경쟁에서 밀리는 최 회장은 국민연금(현재 지분 4.51%)의 지지를 얻으면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는 17일 고려아연 임시주총 안건 중 집중투표제 도입과 이사 수 상한 설정 관련 정관 변경안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두 안건 모두 최 회장 측이 제안한 것으로, 국민연금이 고려아연 현재 경영진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풀이된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시 주식 1주당 선임할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소수 주주가 자신의 의결권을 특정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MBK 측은 의결권 기준 47%에 가까운 지분을 가지고도 이사회를 장악하기 어렵다. 지분율이 더 낮은 최 회장 측이 전략적으로 일부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면, MBK 측이 추천한 이사 중 일부의 이사회 진입을 막을 수 있어서다.
국민연금의 찬성으로 고려아연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제 안건이 통과될 가능성이 커졌다. 출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가 필요한 안건인데, 주주들이 최대 3%까지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른바 ‘3% 룰’이 적용된다. MBK 측은 자신들의 지분만으로는 해당 안건을 부결시키기 힘들고,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지지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결정을 따르는 기관투자자들이 많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이사 선임에 있어서는 집중투표제 도입 여부 등 경우의 수에 따라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했다. 집중투표 방식으로 이사 7인을 선임할 경우 고려아연 추천 이사 3명, MBK 추천 이사 3명의 후보에게 나눠서 투표하기로 했다. 이런 방식이 장기적인 주주가치 제고에 더 부합한다는 이유다. 그 외 집행임원제도 도입 및 소수 주주 보호 명문화 등 나머지 안건에 대해서는 모두 찬성하기로 했다.
MBK 측은 이날 “고려아연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제가 도입된다면 소수 주주 보호라는 제도 본연의 취지는 몰각되고, 최 회장 자리보전 연장의 수단으로만 악용될 것”이라며 “집중투표제 도입 시 1대 주주와 2대 주주 간 지배권 분쟁 국면은 장기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MBK 측은 집중투표제 도입과 이를 전제로 한 이사 선임 안건 상정을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도 법원에 낸 상태다.
고려아연은 이날 국민연금 판단에 대해 “이번 임시주총에서뿐 아니라 앞으로도 소수 주주 권한 강화 등 주주가치 제고와 이사회 독립성·다양성 강화를 위해 지속해서 노력할 것”이라는 환영 입장을 밝혔다.
이번 임시주총에서 MBK 측이 이사회 과반 진입에 실패하면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연장전’으로 간다. 오는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고려아연 측 이사 5명의 임기가 만료돼, 다시 한번 이사 선임을 두고 표 대결을 펼쳐야 한다. 시장에서는 분쟁 장기화 시 최 회장 측과 MBK 측이 이사회 내에서 협상안을 찾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