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 교수(통계학, 전 고려대)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 박사(역사학)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8월 27일 덥고 개다.
1. 한 씨 중심의 이네들에겐 사상운동을 일으킬 확실한 이념이 없다고 나는 본다. 이념이 빈약한 사상단체란 폭력단에 떨어지지 않을까. (이건 말하지 않았다.)
2. 사상운동이란 민간에서 할 일이지, 면민의 치안을 확보하고 식량 배급 기타 임시적이나마 행정권을 가진 치안유지회가 별동대 형식으로 사상운동을 일으키는 건 부당하다. 그것은 결국 독재, 전제를 초래하고야 말 것이다.
3. 백지니까 우리가 먼저 물을 들여 두자는 건 더욱 안 될 말이다. 잘못하면 대립되는 사상운동을 격화시켜서 심각한 투쟁을 야기하기에 이를 것이다.
4. 히틀러, 무쏠리니는 우리의 배울 바가 아니다. 설사 그네들의 과오를 따지지 않고 그 일시적인 성공을 본받을 일이라 친다더라도 같은 경우의 프랑코는 조국 스페인을 비참한 내란에 몰아넣지 않았느냐. 만일 히틀러, 무쏠리니를 본받으려다 잘못해서 프랑코의 지경에 이르면 어찌하느냐.
1945년 8월 17일자 매일신보 기사 “건준위원장 여운형,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에 여 씨의 말이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써 피를 흘린다든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낙을 하였다. 즉
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이니 만치 식량이 제일 문제이니 8, 9, 10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 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여 씨는 엔도 총감의 “응낙”을 받았다고 했으나 최고 책임자인 총독의 응낙은 아니었다. 총독부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곧 보이기 시작했다.
[봉양면에도 16일 오후 경성 차가 오기 전에 병사(兵事) 기타의 기밀서류를 전부 불살라 버리라는 긴급 지시가 있었으므로 면에서도 그날 연합국군이 지방에까지 진주하는 것으로만 믿었다고 그날 밤 회의에서 면장이 말하였다.]
경성 시내에서 태극기를 휘두른 학생을 가두에서 총살했다는 소문으로 보든지 또 이 며칠 동안의 경성일보를 통해서의 군(軍)의 위협으로 보든지 그들의 최후의 발악이 이러하니 여 씨 운운의 사실도 낭설일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서악영(徐岳影) 군의 진지한 태도엔 경복한다. 그에게서 The Sketch-Book 과 Youth and Sex 를 빌려왔다.
8월 28일 개고 덥다.
오후엔 학교에 면내의 개량서당 선생 20명을 모아서 지방문화운동에 힘써야 되겠다는 것이며 또 한글이 세계에 으뜸간다는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들려주고 이내 “한글”이란 문제로 감상문을 쓰게 하였다.
밤에는 밤중까지 〈초당〉을 번역.
8월 29일 아침에 비오고 종일 흐리다.
낮에는 수삼(水蔘)을 많이 사서 먹기 시작하다.
저녁때 늦게 나서서 염수해(廉壽海), 이종원(李鐘遠), 이선호와 더불어 명도리 기와 굽는 흙을 보러 갔다 저물게 돌아오다.
밤에 경찰에 붙들려서 몹쓸 닦달을 받던 꿈을 꾸고 깨어나서 몸에 땀이 솟고 정신이 어찔하다. 내가 소년 시절에 형무소에서 나와서 몇 해 동안 늘 괴롭히던 그러한 꿈이었다. 요사이 전 같으면 은밀히도 하지 못하던 말을 펴놓고 듣게 되는 때문일까. 내 마음 비겁한 까닭일까.
8월 30일 비오다.
갑정이와 옥조는 고향 할아버지 곁에 두고 온 필자의 두 딸이다.
감자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고향에 보내버려서 아내에게 미안하다.
선호를 쌀 두 말 수삼 두 근 지워서 고향 보내다.
저녁 무렵 무궁화 묘종을 옮겨 심었다. 보름 전에 이걸 심을 땐 마음속에 주저하였고 심은 후에도 누가 보고 이건 무슨 꽃이냐고 물을 때 가슴이 뜨끔하고 종내는 차라리 뽑아버릴까 하고 망설이던 걸 생각하면 오늘날 버젓하게 이걸 심을 수 있는 일이 꿈 같다. 저번에 심은 것이 그 가뭄에도 잘 자라났다. 아내가 그 생명력의 강인함에 탄복하였다. 잘 뻗어라 무궁화야.
8월 31일 흐리다.
역에 내리니 “귀환 병정, 응징사(應徵士) 환영, 강원도 영월군”이란 깃발이 보이고 그 외에 평창, 정선 등 군(郡)도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폰으로 “강원도 영월 사람으로 병정이나 징용 갔던 분은 이리로 오시오.” 하고 외치고 있었다. 이 더위에 갖은 고생을 겪고 가까스로 여기까지 돌아와서 다시 몇백 리 산길을 어떻게 토파갈까 하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저 깃발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쁠까. 동포애에 눈물겹고 새 결심이 용솟음칠 것이다. 근래에 보던 중 가장 유쾌한 광경의 하나이다.
제천 조합에 가서 돈 30만 원을 얻어왔다.
밤에는 새 한 시까지 〈초당〉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