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비전이 한국·일본·호주가 바라는 바와 달라진다면 그간 국제질서를 유지해온 리더십이 결핍되는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연세대 교수)은 18일 서울 종로구 동아시아연구원(EAI)에서 열린 '트럼프 2.0 시대의 한국·일본·호주 협력'을 주제로 한 콘퍼런스에서 "트럼프의 개인적이고 독특한 리더십 스타일인 동시에 미국 패권의 쇠퇴를 상징하는 ㄴ이른바 '트럼피즘'이 가속화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손 원장은 "미국 대외 정책의 커다란 구도가 바뀌는 가운데 한국, 일본, 호주라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세 나라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라고도 강조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18일 오전 '트럼프 2.0 시대의 한국-일본-호주 협력: 도전과 대응'을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사진은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이 개회사를 하는 모습. 동아시아연구원
이날 콘퍼런스에서 축사를 맡은 정의혜 외교부 인도·태평양 특별대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양자 무역 협상에 대한 관심도가 다시 높아지고 관세가 인상될 가능성이 있으며 역내 경제 역학도 재편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을 유지한다는 미국의 핵심 목표는 지속될 수 있지만 그 방법과 우선순위는 크게 바뀔 수 있다"고 관측했다. 그러면서 "동맹이 역내 안보를 위한 재정적 부담을 더 많이 감당하라는 압박이 커질 수 있고 이에 우리도 전략을 조정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8일 오전 '트럼프 2.0 시대의 한국-일본-호주 협력: 도전과 대응' 컨퍼런스에서 정의혜 외교부 인도·태평양 특별대표가 축사를 하는 모습. 동아시아연구원(EAI)
역시 축사를 맡은 미즈시마 고이치(水嶋光一) 주한 일본 대사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동맹·우방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수호가 "핵심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즈시마 대사는 "민주주의는 단기적으로는 권위주의 체제보다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한 가치를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즈시마 대사는 트럼프가 종전을 공약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유럽과 아시아의 안보는 연결돼 있고 오늘의 우크라이나가 내일의 동아시아가 될 수 있다"며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18일 오전 '트럼프 2.0 시대의 한국-일본-호주 협력: 도전과 대응' 컨퍼런스에서 발언하는 미즈시마 고이치(水嶋光一) 주한 일본 대사. 동아시아연구원(EAI)
축사에 나선 제프 로빈슨 주한 호주 대사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미국이 관여 정책을 배제하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로빈슨 대사는 "미국의 장기적 이익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경제·안보 측면의 관여를 견고히 하는 데 있다고 호주는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호주·한국·일본의 태평양 지역 동맹은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8일 오전 '트럼프 2.0 시대의 한국-일본-호주 협력: 도전과 대응' 컨퍼런스에서 발언하는 제프 로빈슨 주한 호주 대사. 동아시아연구원(EAI)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미·중 경쟁이 더욱 격화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이날 컨퍼런스에선 "인도·태평양 지역이 미·중 전략 경쟁의 초점이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기조연설을 맡은 하영선 EAI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은 "트럼프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중국의 경제적 야망을 부정하는 데 방점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며 "지금까지 미·중 두 강대국 간 직접적인 대결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향후 역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숙종 EAI 시니어펠로우(성균관대 특임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1세션에서 참석자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전 세계 안보 지형의 재편에 대해 토론했다. 세션마다 한국, 일본, 호주의 학자가 참석해 3국 입장에서 바라본 국제 정세를 논했다.
우선 자유 세계의 지도자를 자임했던 미국의 역할 변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전재성 EAI 국가안보연구센터 소장(서울대 교수)은 "미국이 유지하던 패권의 틀을 내려놓고 대외 정책을 일반적인 강대국의 차원으로 조정해나간다면 과거의 시스템과 근본적인 기둥들은 흔들리게 된다"고 분석했다. 또 "트럼프는 미국의 핵심 이익이 위협받지 않는 지역에선 분명히 발을 빼려고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8일 오전 '트럼프 2.0 시대의 한국-일본-호주 협력: 도전과 대응' 컨퍼런스에서 발언하는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시아연구원(EAI)
바이든 행정부에서 힘을 얻게 된 한·일·호 협력의 동력이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켄 짐보 아시아퍼시픽이니셔티브(API) 원장(게이오대 교수)은 "각국이 마주하고 있는 정치적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한·일·호 3국 협력이 계속되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토마스 윌킨스 시드니대 교수는 일본에 대해 "중견국(middle power)이 아닌 강대국(great power)"이라며 한·일·호 3국 간 협력에 대해 "모든 자원을 끌어모으면 각자, 혹은 양자 간에 이룰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지키겠다는 미국의 공약이 사라지더라도 힘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충분히 힘을 모을 수 있다"면서다.
이어 손 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2세션에선 무역·기술 분야에서 트럼프의 고율 관세 압박 등에 대한 동맹·우방의 대응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멜리사 콘리 타일러 멜버른대 아시아연구소 명예연구원은 "미국은 더는 기존의 무역 질서를 유지하지 않을 것이고 트럼프 2기 행정부 하에선 의심할 여지 없이 불확실성이 강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후쿠나리 기무라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아시아경제연구소 소장은 미·중 전략 경쟁의 여파를 설명하며 "아세안 국가들이 미·중 경제 갈등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며 일본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트럼프가 모든 국가에 10~20%의 '보편 관세'를 도입한다고 압박하는 가운데 이시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은 "관세는 굉장히 강력한 수단"이라고 우려했다. 이 원장은 "한국에 유리한 시나리오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으로서 보편적 관세를 면제받거나 미국이 보편적 관세 대신 상호 관세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