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산업·무역 정책을 총괄할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지명자의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비롯됐다. 29일(현지시간) 러트닉 지명자는 ‘반도체법 보조금을 받기로 미국 정부와 확정한 계약을 이행하겠느냐’는 질의를 받자 “말할 수 없다. 내가 읽지 않은 무엇을 이행할 수 없다”고 답했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 생산기지를 미국에 유치하기 위해 이미 기업들과 체결한 보조금 지급 계약 건에 대해 재검토를 시사한 것이다.
만약 실제로 보조금 지급이 중단될 경우 미국 진출에 따른 비용 부담은 더 커질 전망이다. 사라지는 보조금 액수만큼 추가 자금 조달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년 가동을 목표로 텍사스주 테일러 시에 공장 건설이 한창인 삼성전자의 부담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이미 170억달러를 투자해 2022년부터 공장을 착공했는데, 지난해 투자 규모를 370억달러로 확대했다. 삼성전자의 투자 금액 대비 보조금 비율은 12.8%다. 삼성전자 측은 “지금 당장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겠다는 발표가 나온 것은 아닌 만큼 계획 변경을 언급하기에는 섣부르다”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역시 보조금은 중요한 변수다. 2028년 가동을 목표로 인디애나주에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뿐만 아니라 5억 달러의 대출 지원도 함께 받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점유율 1위이지만 글로벌 공급망을 확대하려면 미국 내 공장이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아직 착공 전인 만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조금이 일부 축소될 경우 투자 규모 조정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은 높은 인건비와 강도 높은 환경 규제로 제조업 수익성이 떨어지지만, 반도체 기업들은 바이든 정부의 보조금으로 이를 상쇄하려는 전략이었다. 실제 미국 애리조나주에 3개의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해 650억달러(약 93조8000억원)를 투자한 TSMC의 경우 반도체 생산 원가가 대만 공장보다 30% 이상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 정부로부터 총 66억달러(약 9조5000억원)의 보조금을 받기로 한 TSMC는 지난해 4분기 첫 공장을 가동하면서 15억달러의 보조금을 먼저 받았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짓는 이유는 반도체 원천 기술을 보유한 미국의 정치적인 요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인 만큼 보조금 문제로 공장 건설을 중단하거나 투자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보조금 축소시 미국 생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만큼 기업들이 투자 규모를 일부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고용 효과 등 적극 강조해야”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도 “미국 정부와 기업 간 체결된 계약을 완전히 무효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정권 초기의 정치적 제스처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보조금이 일부 축소되더라도 향후 지역 상황에 따라 복원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이 보조금 지급을 전면 중단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 “삼성전자의 테일러 공장만 하더라도 건설 노동자와 공장 생산직 등을 포함해 최소 2만개의 직간접적인 일자리가 창출되는 만큼 한국 정부와 기업은 고용 효과와 반도체 공급망 구축의 중요성을 의회와 상무부에 적극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