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도 車 보호무역 강화…"전기차에 유럽산 배터리 써야"

4일(현지시간)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브뤼셀 EU 본부에서 발언하는 모습. AP=연합뉴스

4일(현지시간)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브뤼셀 EU 본부에서 발언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유럽이 미국에 이어, 역내 자동차 산업 보호에 나섰다. 유럽산 제품 사용을 의무화하는 한편, 불공정 무역에 엄정 대처를 선언했다. 글로벌 산업계에 보호주의 기조가 확산하면서 중복 설비 투자가 늘어날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5일(현지시간) ‘유럽 자동차산업 행동계획’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배터리 가치사슬 전반에서 유럽산 제품의 부가가치 비율을 50%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2027년까지 18억 유로(약 2조8000억원)를 투입해 역내 배터리 생산시설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날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탄소 중립 목표를 유지하면서도 실용적이고 유연한 접근 방식을 취할 것”이라며 “역내 전기차 배터리 생산을 늘려 배터리 종속을 피하겠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중국 저장성 진화시에 있는 중국 전기차 제조업체 립모터 공장에서 자동차가 조립되는 모습. AFP=연합뉴스

지난해 9월 중국 저장성 진화시에 있는 중국 전기차 제조업체 립모터 공장에서 자동차가 조립되는 모습. AFP=연합뉴스

EU는 불공정 무역으로부터 유럽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반(反)보조금 조사 등 방어 수단도 꺼내들었다. 관세를 피하려는 우회 수출 등, 전기차 공급망 전반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적극 단속하겠다는 거다. 유럽산 배터리 부품 사용도 의무화한다. 의무 사용 비율은 곧 발의할 산업탈탄소화촉진법 등에 구체적으로 규정할 전망이다. 

유럽이 역내 산업 보호에 발 벗고 나선 건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지난달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EU가 “미국을 뜯어먹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주장하며, 자동차를 포함한 유럽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매기겠다고 했다. 실제로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미국으로 생산시설 이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짐 로언 볼보 최고경영자(CEO)는 5일 로이터에 “(관세율이) 10%라면 대처할 수 있겠지만, 25%까지 올라간다면 어렵다”며 “(유럽의) 일부 생산라인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공장으로 이전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EU는 저가 전기차를 앞세워 유럽 시장을 파고드는 중국 기업도 겨냥한다. EU는 지난해 10월 중국산 전기차에 최고 45.3%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 장벽을 세웠고, 중국산 전기차 점유율은 8.2%(10월)에서 7.5%(11월)로 떨어졌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EU 관세 조치로 중국의 전기차 수출이 매우 어려워졌다”라며 “중국 업체들도 유럽 현지에서 생산과 고용 활동을 해야 전기차를 팔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1위 전기차 기업 중국 비야디(BYD)는 지난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3번째 유럽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국내 자동차 업계도 유럽 현지 생산을 늘려 규제 대응에 나선다. 현대차는 내연기관을 생산하던 튀르키예 공장에서 내년부터 전기차를 혼류생산(한 라인에서 여러 차종을 생산)한다. 유럽 전략형 모델을 생산해 무역 장벽과 환경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서다. 기아는 슬로바키아 공장에서 지난달 공개한 새 전기차 모델 ‘EV2’와 ‘EV4’를 양산할 계획이다.

현대차가 지난 1997년 설립한 튀르키예 공장 전경. 사진 현대차

현대차가 지난 1997년 설립한 튀르키예 공장 전경. 사진 현대차

전문가들은 현지 생산 확대에 앞서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공장을 짓는 데에는 수년의 시간과 수조 원의 돈이 들지만, 현지 소비자 선호와 판매량은 몇 개월 만에도 급변할 수 있다”라며 “자동차 산업 전반적으로 과잉 설비 투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완성차 기업 간 협력이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관세 부과 전 美 신공장 준공식 검토하는 현대차 

트럼프 정부가 멕시코·캐나다에 부과한 25% 관세 중 자동차만 한 달 유예하기로 함에 따라, 다른 완성차 업체들도 4월 2일로 예정된 자동차 관세 유예 조치를 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백악관은 미국 산업 보호를 관세를 일단 유예한다고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미국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고 투자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여전히 관세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완성차 업체가 얼마나 투자를 하느냐에 따라 4월 관세 협상에 여지를 둔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르면 이달 말 미국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준공식을 열 계획이다. 준공식에서 현대차그룹이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준공식 시점은 아직 미정으로 3월 말부터 4월 중순 사이”라면서, “관세 정책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변동하는 만큼 모든 시나리오를 열어두고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아는 멕시코 몬테레이 공장에서 준중형 세단 K4를 생산해 미국에 판매하고 있는데, 이번 관세 유예 조치로 일단 한 달간의 시간을 벌었다. 기아는 멕시코 공장 생산 물량을 캐나다·남미·중미 등지로 수출하는 등, 기존 물량을 소화할 다른 시장을 찾아 관세 영향을 줄이려 한다. 또 미국 현지 생산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