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전용기에서 기자들에게 설명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유럽중앙은행(ECB)은 올해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말 기준 1.1%에서 0.9%로 낮췄다. 내년은 1.4%에서 1.2%로 내렸다. ECB는 “올해와 내년 무역정책 등 광범위한 정책의 불확실성에서 비롯하는 수출 감소와 지속적인 투자 둔화를 반영했다”며 “무역 긴장이 고조되면 유로화 가치가 하락하고 수입 비용이 증가해 물가 상승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은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25% 관세 부과를 고집한다면 “똑같이 대응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미국과 EU가 관세를 두고 전면전을 펼칠 경우 세계 경제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타깃이었던 중국ㆍ멕시코ㆍ캐나다의 상황도 암울하다. 지난달 멕시코중앙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2%(지난해 11월)에서 0.6%로 반 토막 냈다. 멕시코중앙은행은 경기침체로 빠져들 경우 최대 0.2%까지 위축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캐나다중앙은행 역시 지난 1월 말 올해 성장률 전망을 2.1%에서 1.8%로 낮춰 잡았다.
이미 미국과 관세 전쟁에 돌입한 중국은 지난 6일 양회(兩會)에서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를 ‘5% 안팎’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중국의 성장률을 이보다 낮게 보고 있다. 최근 골드만삭스와 HSBC는 4.5%, UBS의 경우 4%로 성장률 전망치를 내렸다. 주요 대미(對美) 수출국인 인도(7.2→6.4%)ㆍ대만(3.29→3.14%)ㆍ태국(2.9→2.5%) 등도 올해 성장 전망을 낮추며 ‘트럼프세션’ 경보를 울리고 있다.
한국 경제도 이런 흐름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25일 올해 경제 성장률을 기존 1.9%에서 1.5%로 하향 조정했다. 미국의 관세정책은 트럼프 취임 이전 예상됐던 것보다 강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다. 여기에 무역 전쟁이 보복전 양상으로 치닫는 최악의 경우 추가로 성장 전망치를 0.1%포인트 더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지난 1월 세계은행은 올해 세계 경제가 지난해와 같은 2.7%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이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전에 발표한 수치다. 세계은행은 미국이 1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고, 다른 나라들이 맞대응에 나설 경우 전망치보다 0.3%포인트가 낮아질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전면적인 무역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피해를 볼 것이란 얘기다.
세계은행의 경고는 현실이 되는 분위기다. 세계 각국이 무역 보호 장벽을 세우면서 성장 동력인 교역량이 크게 줄어들 조짐이 이미 보인다. 교역량의 선행지표인 컨테이너 해상 운임(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은 지난 7일 기준으로 14개월 만에 최저치를 찍었고, 항공 운임(발틱항공운임지수)은 올해 들어 20%나 떨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역설적으로 미국이 가장 크게 볼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벌써 시장에선 미국 경기 침체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이 추산해 공개하는 성장률 전망 모형인 ‘GDP나우’는 지난 6일 올해 1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을 전기 대비 -2.4%(연율 환산)로 제시했다. 성장률이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나타낼 경우 기술적으로 경기 침체 상황에 놓인 것으로 본다. 골드만삭스는 12개월 내 경기 침체 발생 확률을 15%에서 20%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10일 “(경기침체에 대해) 예상하는 것을 싫어한다”면서도 “(이런 일에는) 과도기(transition)가 있다”라고 밝혔다. 시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침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데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도 고개를 든다. 실제 올 1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3.0%로 지난해 6월 이후 7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관세 부과가 예고된 품목인 철강 값은 미국에서 연초 대비 30% 뛰었으며, 같은 기간 구리 값도 20% 올랐다. 관세 부과 전에 물량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몰린 탓이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관세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블록화 경향이 강해지면 물가가 오르고, 여기에 경기 침체가 동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