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승부’는 바둑계의 전설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간 바둑 대결을 그렸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이병헌은 “바둑의 신과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은” 자신감으로 ‘바둑 황제’에 등극한 조훈현을, 유아인은 스승 조훈현을 넘어서는 ‘바둑 천재’ 이창호를 연기했다. 영화는 사제지간이지만, 프로의 세계에선 서로를 반드시 이겨야 하는 둘의 숙명적 고뇌를 드라마틱하게 담아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에 이어 또 다시 실존 인물을 연기한 이병헌은 2대8 가르마, 치켜 올라간 눈썹, 검지와 중지로 턱을 괴고 다리를 떠는 습관 등 조훈현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낸다. 2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조 국수(조훈현)를 만나 그의 성격, 버릇 등을 관찰했다”며 “다큐멘터리와 사진에서 본 모습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그대로 했는데, 예고편을 본 조 국수가 ‘나인 줄 알았다’ 하셔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배우가 바둑돌 만은 제대로 잡게 해달라”며 영화화를 허락한 조훈현의 부탁에 따라, 이병헌은 프로 바둑기사에게 교습을 받으며 자세를 익히고, 집에 바둑판을 들여놓고 연습을 이어갔다.

이병헌은 조훈현(사진 왼쪽)의 외모 뿐 아니라, 심리도 세밀히 표현해냈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제자에게 패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조훈현은 ‘바둑은 냉혹한 승부이자 자신과의 싸움’이란 초심을 되찾고 도전자로 다시 제자와의 대결에 나선다.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선 조훈현처럼, 이병헌도 실패의 시간을 겪었다고 했다. 1990년대 TV드라마로 인기를 누렸지만, 영화에선 데뷔작 ‘런어웨이’(1995)부터 네 편 연속 흥행에 실패해 ‘국밥 배우’로 불렸던 흑역사다.
“당시 충무로에선 신인이 영화 두세 번 망하면 끝이었는데, 저는 네 편을 연속해 말아 먹고도 다섯 번째 영화에 캐스팅됐어요. 충무로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히죠(웃음).” 그는 다섯 번째 영화 ‘내 마음의 풍금’(1999)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번지점프를 하다’(2001) 등을 잇따라 흥행시키며 충무로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았다.
자신을 ‘영화배우 이병헌’으로 소개하는 게 기뻤다는 그는 그래서 우여곡절이 많던 이 영화를 극장에 걸게 돼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승부’는 유아인의 마약 파문으로 개봉이 미뤄진 채 OTT로 직행할 뻔하다 신생 투자배급사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배급을 맡으며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