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각국별로 부과한 상호관세를 직접 발표하며 이날을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28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일 이내에 상호관세를 무효화하는 새 행정명령을 발표해야 한다. 로이터=연합뉴스
“대통령이 무제한적 관세 부과 권한 없다”
3명의 판사로 구성된 연방국제통상법원 재판부는 이날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일 부과한 상호관세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펜타닐 대응을 위해 캐나다·멕시코·중국에 부과한 10~25%의 관세도 무효로 봤다.
재판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부과의 법적 근거로 삼은 IEEPA가 “무제한적 관세를 부과할 권한을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관세의 부과 권한은 의회에 있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IEEPA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의회 의결 없이 권한을 남용해 관세 부과의 근거로 삼았다는 취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1월 31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자신의 서명을 지켜보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무역적자를 ‘비상사태’로 규정하면서 해당법을 통한 관세를 부과했지만, 법원은 “무역적자는 만성적 문제이고 최근 갑작스럽게 크게 악화되지 않았다”며 트럼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10일 내 관세 스톱…“거부시 법정모독 등 추가”
백악관은 즉각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비선출 판사가 국가 비상사태를 적절히 해결하는 방법을 결정해선 안 된다”고 반발했다. 백악관의 ‘실세’로 불리는 스티븐 밀러 부비서실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고삐 풀린 사법 쿠데타”라고 맹비난을 가했다. 케빈 하셋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은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항소심에서 승소할 것으로 확신한다. 협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세 건은 사실상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만 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행정명령에 따른 상호관세 부과는 위법하다″는 법원의 결정이 나온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그(트럼프)는 신(god)의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는 문구가 적힌 사진을 게시했다. 트루스소셜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법원의 명령에 따라 10일 이내에 판결의 결정을 반영한 새 행정명령을 발표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했던 비상식적 고율의 상호관세는 행정명령 발표 직후부터 무효가 된다.
외교소식통은 본지에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취소 행정명령을 발표하지 않을 경우 법정모독 등 또 다른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며 “법정모독에 대한 책임이 무역대표부(USTR)나 법무부를 넘어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도 일단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일단 한국에 부과된 상호관세도 새 행정명령과 함께 무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앙적 시나리오…관세 협상력 저하”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은 지난 23일 법원 판결에 앞서 각각 성명을 제출하고 상호관세 부과를 위법으로 판단할 경우 “국가 안보 구조의 초석이 해체될 것”이라며 압력을 가했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부 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지난 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중국과의 무역 협상을 마친 후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관세가 인도·파키스탄의 휴전 중재에 도움을 줬다”며 “대통령 권한을 제한할 경우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수백만 명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관세 부과를 금지하는 결정은 외교 정책에 재앙적 시나리오(disaster scenario)”라며 “중국과의 관세 연기 또는 인하 합의가 파탄나고 현재 진행 중인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도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동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재앙적 상황’에 처하게 됐다.
품목별 관세는 미적용…“韓 득실은 불확실”
다만 법원의 결정이 미국과 관세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이날 판결은 IEEPA를 근거로 부과된 상호관세에 적용되지만,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철강·자동차·반도체 등에 부과되는 25%의 품목별 관세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부 장관, 허 리펑 중국 부총리, 리청강 중국 국제무역대표부 대표 겸 상무부 차관이 지난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미중 양자 회담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미중은 스위스 담판을 통해 서로를 향한 관세를 대폭 인하하는 '관세 휴전' 협정을 맺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밖에 트럼프 대통령이 IEEPA 대신 무역법 122조나 301조, 무역확장법 232조 등 다른 법을 근거로 상호관세를 재차 부과하거나 관련법 자체를 개정하는 등의 우회로를 택할 가능성도 있다.
무역법 122조를 적용할 경우 최고 관세율은 15%, 적용은 150일로 제한된다. 관세 부과 연장을 위해선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무역법 301조 등을 적용하더라도 무역 상대국을 대상으로 최장 270일의 조사 기간을 거쳐야 한다.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상황에서 입법도 가능하지만, 이 역시 지역별로 다은 이해관계로 인한 당내 이탈표 방지가 변수다.
美 배려 영국 의외의 수혜…“백악관 대응 예의주시”
일각에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가장 먼저 관세 협상에 응했던 영국이 결과적으로 수혜자가 됐다”는 말도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영국과의 무역 협정 결과에 대해 발표하던 중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외교소식통은 “정부의 예상보다 미국의 법원이 빠른 판결을 내렸다”며 “주요 품목에 대한 품목별 관세에 대한 불확실성이 보다 확대된 상황이기 때문에 향후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책을 면밀히 검토해 가장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인사는 “법원의 결정을 예상하지 못한 정부는 비상 대책 마련에 돌입한 상황”이라며 “한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들은 미국과의 협상과 관련한 손익계산 이후 속도 조절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