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전 대법관
“정치권의 판결 불복, 정의가 아닌 ‘내 편’ 찾는 정치행위”

박일환(74) 전 대법관은 2010년 정치권에서 대법관 증원 압박을 이어갈 당시 법원행정처장으로 법원의 입장을 대변하며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엔 "득보다는 실이 크다"는 결론에 따라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지금 다시 대법관 증원을 추진하려는 상황에 대해 박 전 대법관은 “2010년엔 여야 구분 없이 찬성 반대가 반반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공감대 없이 한쪽에서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 보니 우려가 커진다”고 말했다. 지난 28일 박 전 대법관을 만나 위기의 사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들어봤다.
위기의 사법부, 사법 불신에 정치화 우려까지
A. “재판은 정의를 구현하는 절차라기보다는 분쟁 종식의 수단이다. 판사도 사람인데 어떻게 정의를 100% 구현하겠나. 판결은 ‘인제 그만 싸우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결정이다. 정의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프랑스엔 ‘피레네 산맥 북쪽의 정의가 남쪽에선 정의가 아니다’는 속담이 있다. 재판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불복하고 판결의 정의를 따지면 불신만 가득한 사회가 된다.”
Q. 정치적 사건에 대한 재판부 결정과 판결을 놓고 여론이 양분된다.
A. “정치권이 고소·고발을 이어가며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쟁점 사건들이 법원으로 밀려오고 있다. 정치권이 법원을 상대로 내 편을 찾는 정치 행위를 한다. 무죄가 나면 사법부에 경의를 표하지만, 판결이 뒤집히면 갑자기 판사의 편향성을 제기한다. 그들에게 사법부란 도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정치인들이 정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분쟁과 다툼을 법원에 떠넘기는 ‘정치의 사법화’가 계속될수록 사법부는 멍이 들 수밖에 없다.”

대법원은 지난 1일 전원합의체 선고를 통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사진공동취재단
Q. 사법의 정치화도 문제 아닌가.
A. “정치권이 법관의 정치화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헌법재판관 추천 제도가 대표적이다. 대통령이나 국회는 점점 더 판사만 헌법재판관으로 추천·임명하려 한다. 역대 헌재 구성을 보면 재판관 전원이 법관 출신인 경우가 많다. 대통령·국회·대법원장 등으로 추천 권한을 나눈 건 비법관 출신이 재판관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 아닌가. 지금은 정치권에서 판사를 유혹할 수 있는 구조가 됐다. 우리 말 잘 들으면 한자리 준다는 식 아닌가.”
Q.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자 대법원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A. “다른 사건에 비해 절차가 무척 신속했던 건 맞다. 대선 후보인 만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봤을 수도 있다. 1심과 2심의 결론이 다른 상황이었고, 재판 결과가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연결되는 상황 아니었나. 그렇다 해도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 의문이다.”

박일환 전 대법관은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추진되는 대법관 증원에 대해 "대법관이 증원될 경우 전원합의체에 회부 사건에서 발생할 혼란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대법관의 수를 늘리는 게 정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A. “최근 논란이 된 정치적 사건들의 경우 대부분 가치판단이 필요한 경우였고, 이런 상황에선 법 해석에 대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나뉘며 판사마다 결론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다만 사건 당사자들 입장에선 상급심에서 결론이 바뀌는 상황이 많아질수록 금전과 시간이 추가로 드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항소와 상고를 남발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라도 지금은 대법관 증원이 아닌 1·2심 판사의 질을 높이는 방향의 투자와 환경을 조성해 1·2심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
지난 26일 민주당은 ‘대법관 100명 증원 법안’이 논란이 되자 철회했지만, 이재명 후보는 지난 28일 대법관 증원을 포함한 정책 공약집을 발표했다. 규모의 문제일 뿐 대법관 증원은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2010~2011년 한나라당은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대법관 증원을 추진했는데 당시 박 전 대법관은 법원 행정사무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장이었다.
대법관 증원에 4심제까지…사법부 겨눈 개혁안
A. “대법관(현재 14명)을 100명으로 늘려 전원합의체에서 토론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국회도 각 상임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20~30명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토론으로 결론을 내기 어려우니 결국 소위에서 논의한 뒤 전체회의에서 추인하지 않나. 대법관 증원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추진됐지만, 그 폐해가 더 크다는 공감대가 있어 무산됐다. 수를 늘리는 게 정답은 아니다.”
Q. 독일도 대법관이 300명 이상이라는 반론이 있던데.
A. “독일 '최고법원 법관'을 한국의 ‘대법관’으로 번역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독일은 각 부의 부장만 전원합의체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판결문을 쓰거나 의견을 개진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국 대법원도 판사인 재판연구관이 100여명이 있지만, 이들은 대법관이 아니다.”
Q. 대법관 업무 과중(1인당 연간 3000여건 처리)을 위해서라도 증원이 필요하지 않나.
A. “대법원을 키우려면 2심 판사들이 대법원으로 올라가야 하고, 공백이 생긴 2심 판사는 1심 판사들이 메워야 한다. 대법원 키우자고 1, 2심이 더 허약해질 수 있다. 재판 결과에 불복한다는 이유로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세 번의 판단을 받는 3심제의 필요성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됐다. 2심에서 대부분의 사건은 종식되는 사실상 2심제로 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물론 그 전제는 1, 2심 판단 과정을 대폭 강화해 신뢰를 높여야 한다.”
Q. 민주당이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헌법 소원을 제기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하면 사실상 4심제가 될 텐데.
A. “지금도 재판 지연 때문에 사건이 대법원까지 가면 4~5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다. 천신만고 끝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는데 또 헌재에서 판단을 받는다고 하면 국민에게 어떤 이득이 있나. 만약 헌재 결정에서 어떤 문제 사례가 발견되면 이번엔 5심제를 하자고 할 건가. 이런 불신의 구조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Q. 대법관 증원이나 4심제가 정치권의 사법부 흔들기이자 삼권분립 침해라는 비판도 나온다.
A. “최근 상황은 삼권분립 문제라기보다 법원의 독립성에 대한 문제다. 법원은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절차를 통하여 분쟁을 종결하는 기관이지만 본질적 존재 의미는 국민의 기본권 보호다. 지금의 사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한테 유리한 방식으로 뜯어고치려는 것은 법원의 이런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닌가.”
"재판지연은 평가하고 책임 물어 판사 스스로 해결해야”

재판지연은 사법부의 고질적 문제이자 조희대 대법원장의 최우선 과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공감대에도 수년째 재판 지연의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상황은 악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Q. 피고인이 정치인이거나 고위 관료인 경우 재판 지연이 눈에 띄게 많다.
A. “10년도 더 된 고질적 문제지만 그동안 정치권에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재판이 지연되는 건 결국 국민 피해로 이어지는 데 관심조차 없다가 특정 사건에 대한 판결이 불리하게 나오니까 갑자기 재판 지연을 언급하며 모든 것을 법원의 문제로 지적한다면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
Q. 조희대 대법원장이 신속한 재판을 수차례 강조했지만 체감할 변화가 없다.
A. “형사소송법은 기본적으로 모든 조문이 재판을 빠르고 신속하게 하는 방향으로만 구성돼 있다. 지금 같은 재판 지연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고 예방·방지할 장치도 없다. 재판을 지연해 달라는 수요가 늘면서 어느 순간 변호사들이 '법 기술자'가 돼서 그런 요구에 응하니 법조계 전체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Q. 재판 지연 막을 해법은 없나.
A. “결국 판사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문제 해결의 첫 단추는 투명하고 정확한 평가다. 기간별 사건처리 건수 등으로 판사들을 엄격하게 평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다만 이런 평가 제도를 위해선 인사이동과 사무 분담을 최소화해야 한다. 법관 인사가 너무 잦다 보니 재판 지연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책임감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박일환=1951년 경북 군위 출생. 서울법대 졸업. 사시 15회. 제주지방법원장·서울서부지방법원장을 역임했고,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법관에 임명됐다. 2009년 6월~2011년 10월 법원행정처장을 맡았다. 퇴임 이후인 2018년 12월부터 ‘차산선생법률상식’이라는 유튜브 채널로 생활 법률 상식을 전하고 있다. 법무법인 바른에서 고문변호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