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개다. [2시 기상]

아침 먹으면서 주인이 물가고(物價高)를 걱정하기에 그것도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그보다도 물가고로 말미암아 근검과 저축에 대한 신뢰가 근저(根底)로부터 뒤엎인 결과, 착실히 업(業)에 힘써서 내일을 준비하자는 생각이 없어지고 그리했댔자 장래의 보장도 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하는 것이 지지리 못생긴 짓만 같이 생각되어서 어디 요행의 모퉁이는 없을까 어디 폭리의 언저리는 없을까 하고 사람마다 눈이 뒤집혀서 날치니 이래서는 도저히 완미한 건설을 기할 수 없으며 장래에까지 좋지 못한 영향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정치의 무능이 사람들을 모두 환장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래도 이 민족이 착실하지 못하다고 질책하는 자 있느냐. 이 모순 밑에서 이만침 질서를 지켜가는 것이 기적이다.
주인의 말이 수삼 개월 내로 경제계가 바로 서겠다는 관측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기, 나는 그러한 억측과 예언을 할 수 없다. 대저 경제계의 추이(推移)는 여러 가지 소인(素因)이 겹드러서 결정지어져 가는 것인데 지금 예견할 수 있는 소인을 종합해서 어떠한 판단을 내린다더라도 그 동안에 어떠런 정세의 변동이 있고 여허(如許)한 새 소인이 작용해서 결론이 어떻게 뒤바뀔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미리 무어라 말할 수 없노라 하였다.

너희들이 정구나 탁구를 치는 걸 보고 나는 매우 기쁘게 여겼다. 아직 솜씨가 능숙해지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모두들 정공법으로 공을 받을 뿐이요 한 사람도 상대편을 골리려는 생각으로 고약스레 받아넘기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경향이라고 나는 본다.
구기(球技)를 배우는 데 세 가지 마음가짐이 있다고 나는 본다. 첫째는 처음부터 독특 교묘한 수법을 써서 남을 골리려고 하고 또 그러는 게 솜씨있게 여기는 것이며 둘째는 처음 얼마 동안은 순순하게 배우다가 얼마쯤 익힌 뒤엔 솜씨를 마구 부려보려고 하는 것이며 셋째는 처음은 물론 끝까지 정공법을 써서 일보(一步)도 이탈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아무리 이상스런 수법을 쓰더라도 자기는 순순하게 이걸 받아넘기며 그 때문에 경기 때 불리한 결과가 온다더라도 조금도 개의하지 않는 말하자면 우직한 태도이다.


너희들은 이러한 점에 특별히 유의해서 똑바른 조선의 딸들이 되어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일하라. 마침 너희들의 뽈 치고 뽈 받는 걸 보고 느낀 바 있어 몇 마디 전한다.
역사 시간엔 진화론을 이야기해 주었더니 크리스찬들의 반대가 있어서 자미로웠다.
11월 18일 개다. (일) [4시 기상]

종일 〈초당〉 번역.
어제 원주 갔다 오니 기봉이가 똥가레를 맞아서 찡찡거리기 걱정했더니 오늘은 잘 놀았다.
벽에 그림을 붙여주었더니 만져보고 좋아라고 마구 환성을 지른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며칠 전부터 쉬- 쉬- 하면 오줌을 가린다고 한다.
11월 19일 (시월 보름) 흐리다. (월) [4시 기상]

아침에는 국사강좌를 시작해서 조선민족의 기원 이야기.
주먹밥 싸는 종이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박아넣다.
전재(戰災)를 입고
외지로부터 돌아오는 형제자매여
이역 풍상에 고초인들 오직하였으리까.
이제 해방된
고향 산천의
고국 동포들이
두 손을 들고 그대들의 귀국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조국은 지금 중대한 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삼천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건국의 초석이 되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조선의 새 건설에 바쳐야 할 때일까 합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눈앞에 패전 일인의 참상이 역연(歷然)히 보입니다.
상기 정신을 차려서 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와 우리들의 자손은 영원한 도탄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아래 일들을 명심합시다.
1. 정치로만 몰리지 말고 직장을 잘 지켜나갑시다.
2. 너무 상업으로 달리지 말고 생산에 힘씁시다.
3. 사리사욕을 버리고 국리민복을 도모합시다.
4. 요행과 폭리를 추구하지 말고 착실한 생업에 전력을 기울입시다.
5. 자기고집을 버리고 대동단결로 나아갑시다.
〈신단실기(神檀實記)〉 다 읽다.
11월 20일 [2시 기상]

나 역시 못 배기도록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귀찮다”라 하기엔 너무나 심각한 괴로움이 내게 있습니다. 그럴 땐 몇천 몇백의 서러운 말들이 가슴속에서 소리치지만 지우고 또 지우고.
지긋이 입을 다물고 참아 왔습니다. 이후도 참아 가오리다.
삶이란
났으니 죽는 날까지 걷지 않으면 안 될 머언 길인가 합니다.
터벅터벅 가고야 말 길인가 합니다.
때로 정다운 길벗의 위로가 있다기로 이 가고야 말 이 가고야 말 먼 길의 고달픔이야 가실 리 있으리까.
꽃이 피었다기로 새가 울기로 내내 이 길이 즐거울 수야 있겠습니까.

새도 없고
꽃도 진 듯한.
윤 학자님이 삼학사의 시 몇 수를 적어 보내어주시었다. “오달제기처(吳達濟寄妻)”란 시를 아내와 함께 읽고 눈물 머금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전부터 마음먹었던 시가(詩歌) 조선사를 기어이 이루어보고 싶다.
[琴瑟恩情重 相逢未二朞 (금슬의 은정이 소중한데 만난 지 두 해가 되어 가는구려.)
今成萬里別 虛負百年期 (이제 만리 떨어져 있어 백년의 기약을 헛되이 저버렸다오.)
地闊書難寄 山長夢亦遲 (땅이 넓어 편지도 어렵고 산이 길어 꿈조차 늦어지는군요.)
吾生未可卜 須護腹中兒 (내 앞날은 점칠 수 없으나 복중의 아이는 꼭 지킬 것이요.)]
오후에 서(署)의 경무주임 최병근(崔秉根) 씨가 인사하러 왔다. 전 같으면 경관이 집에 오면 먼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데 이제 명랑한 기분으로 그들을 맞을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아내와 함께 이야기하고 웃다.
11월 21일 새벽에 비 내리더니 [3시 기상]

한 사람의 기쁨을 이루어주지 못하고 어찌 3천만의 행복을 염원할 수 있으랴.
고요한 초겨울 밤 낙엽을 두들기는 빗소리 들으면서 지나온 생애의 가지가지 과오를 묵념하니 다만 가슴 쓰릴 뿐.
이 과오를 지닌 채 앞길을 헤쳐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맴돌 뿐
여년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상심하실 일에 생각이 미치니 모든 생각이 주춤해지고 만다.
벗을 수 없는 굴레를 쓰고 허덕허덕하는 것이 인생일지라 내 마음 비록 이 운명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다더라도 그래도 좀 더 깨끗이 살 길은 없을까. 비록 내 주위의 사람들만일지라도 좀 더 기쁘게 해주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내 그에게 시종 진심으로 대했으매 설사 일시적인 오해가 있더라도 언제든 나를 이해할 때가 올 터이지, 하고 나는 안연(晏然)하였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자 함이요 속속들이 내 마음의 상처 아닐 수 없다.
내 성심(誠心)이란 내 자위(自慰)에 그치는 것일까.
인생이 아주 절벽처럼 느껴진다.
새벽에 우연히 정재륜(鄭載崙)의 〈견한록(遣閑錄)〉을 읽다가
余嘗向先君曰 大人之薦李公 自是廟堂之例事 而至其有謗而再詢之時 則上心已動矣 大人猶不變初心益保其無他 將何以恃李公 若此之際耶 先君曰 吾於丙子之亂與李浣具在陣中 晝夜同處 黙察其倉卒間處心之際 則終非負國家者 是以知之深而薦之堅也 豈無所以而爲之者哉 (내가 일찍이 선군께 여쭙기를 “아버님께서 이 공을 천거한 것은 그후 묘당에서 본받는 일이 되었지만 비방이 나오고 [주상께서] 다시 물으실 때는 주상의 마음이 이미 움직인 것인데도 아버님은 그래도 초심을 바꾸지 않으시고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더욱 보증하셨으니, 이 공을 믿으시는 마음이 어찌 그리 깊으셨습니까?” 하니, 선군께서 “내가 병자년에 이완과 함께 진중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였다. 그가 창졸간에 마음쓰는 걸 가만히 살펴보니 끝내 나라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깊이 알고 굳게 천거한 것이니, 어찌 이유도 없이 그랬겠느냐?” 하셨다.)

[해설: 이 대목을 비롯해 인용된 한문 자료에 독자의 편의를 위해 번역을 붙였으나 완전한 번역이 못 됨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교우지도(交友之道)를 반성하여 이에 미치다.
[해설: 정재륜의 부친 정태화(1602-1673)와 이완(1602-1674)은 조선조의 문관과 무관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꼽힌다. 벼슬길이 평탄했던 정태화와 달리 이완은 여러 번 정치적 난관을 겪었으나 정태화의 꾸준한 옹호가 있었음을 이 글에서 알아볼 수 있다.]
전재동포 충북구호회 제천군 지회 결성식이 있다고 해서 오전 중에 보행으로 읍에 들어가서 참석. 최재익(崔在益) 씨의 설명에 의하면 재일동포의 참상이 불가형언인 듯.
충북의사회 중심의 구호반이 하관(下關)까지 가서 본 실정에 의하면 일지(日紙)는 모두 조선에 있는 일본인이 박해를 입는다는 근거 없는 사실을 보도하기 때문에 민심이 격앙해서 우리 동포에게 대한 식량 배급을 정지하므로 다년간 그 땅에서 생활의 기초를 쌓아오던 사람들이 선편을 기다릴 수도 없어서 모두 하관으로 몰려드나 연락선은 징병 징용으로 갔던 사람들에게 우선권이 있으므로 타지 못하고 헛되이 시가를 방황하는 중 기한(飢寒)은 심하고 역병(疫病)이 유행하고 해서 목불인견의 참상을 이루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나자 최재익 씨와 함께 단양 행.
밤에는 단양조합 정무용(鄭武容) 씨 등이 연석(宴席)을 베풀어서 야반에 이르렀다. 요릿집다운 요릿집에 하도 오랜만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서 서먹서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