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호 정채호 선장

우리나라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호의 정채로 선장이 모항인 전남 여수시 소호요트마리나에서 조타키를 점검하고 있다. 그의 손에 페인트가 묻어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전남 여수시 사도로 향한 코리아나호는 우리나라 유일한 범선이다. 한국에서 진수식을 올린 지 올해로 30년. 마침 30회를 맞는 바다의 날(5월 31일)도 앞두고 있었다.
“돛 올리자!”
정 선장의 외침에 코리아나호의 11개 돛 중 맨 앞의 ‘제노아’가 5분 만에 활짝 펼쳐졌다. 그런데 달랑 하나만 올리다니.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 선장처럼 “쇼를 시작해 봅시다”와 비슷한 일갈을 바랐는데. “연안 운항에는 돛을 많이 펴면 속도가 너무 붙어 위험해요. 그리고 운항이 무슨 쇼도 아니잖아요.”
전남 일대에서 온 학생과 학부모 47명이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정 선장이 다시 외쳤다. 이번엔 잭 스패로로 분한 조니 뎁이 됐다. “자, 우리 한번 힘차게 소리 질러요. 파이팅!” 긴장과 흥분 대신 패기와 기대감이 바다 위로 뿜어져 나왔다.
"이 배는 내 배, 꼭 살 것" 진해에 억류 중인 범선 구입
범선(帆船). 풀어쓰면 돛단배. 게다가 사명이라니. 영화 ‘미션(1986)’이 문득 떠올랐다. 얼마 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속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1750년대 라틴아메리카 순교를 그린 작품. 배경에는 제국의 각축이 있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무너진 뒤 유라시아 육로가 막히면서 열린 대항해시대도 저물던 시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버티고 있었고 영국은 떠오르고 있었다. 영국 탐험가 월터 롤리(1552~1618)의 말대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그 최전선에 범선이 있었다. “역사가 바다의 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정 선장이 조타기를 부선장에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한국의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호는 전장 41m에 총 톤수 135t, 11개의 돛을 다는 마스트(돛대) 높이가 최고 30m다. 맨 앞에 다는 제노아 돛을 포함해 모든 돛을 합치면 931㎡의 넓이가 된다. 코리아나호가 모항인 전남 여구시 소호요트마리나에 정박해 있는 사이, 관광객이 찾아와 정채호 선장(사진 맨 아래 하얀 모자 쓴 사람)의 설명을 듣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지난해 9월 길이 111m, 폭 13.5m, 무게 2350t의 대형 범선인 인도네시아의 비마수치함이 한국 해군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부산에 입항했다. 승조원들이 돛대에 도열해 있다. [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5/31/275e31b3-faa4-4ad8-8f79-15022ca5eb57.jpg)
지난해 9월 길이 111m, 폭 13.5m, 무게 2350t의 대형 범선인 인도네시아의 비마수치함이 한국 해군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부산에 입항했다. 승조원들이 돛대에 도열해 있다. [연합뉴스]
아이러니다. 페리 제독이 1853년 일본의 문을 두드렸을 때 흑선이라고도 불린 대형 범선과 증기선은 일본인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 '흑역사'를 축제로 만들다니. 우리에겐 프랑스 범선이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문수산성을 초토화한 기억(병인양요·1866)도 있지 않은가. 정 선장은 "바다의 역사를 잘 써먹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853년 7월 8일 일본 우라가에 내항한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을 묘사한 그림. ‘서스퀘해나’(증기선 ) ‘미시시피(증기선)’, ‘새러토가(범선)' ‘플리머스(범선)' 4척으로 구성됐다. [사진 위키백과]](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5/31/8a46d999-2865-4d74-b43b-525841ff6dd0.jpg)
1853년 7월 8일 일본 우라가에 내항한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을 묘사한 그림. ‘서스퀘해나’(증기선 ) ‘미시시피(증기선)’, ‘새러토가(범선)' ‘플리머스(범선)' 4척으로 구성됐다. [사진 위키백과]
코리아나호는 18세기 영국과 자웅을 겨루던 해양 강국 네덜란드에서 1983년 건조됐다. 길이 41m, 총톤수 135t. 30m까지 치솟은 마스트(돛대)는 넷. 돛 11개를 모두 펼치면 931㎡, 300평짜리 논 한 마지기 넓이다. 자체 엔진을 가동해 평소 9~10노트의 속력으로 달리다 맨 앞의 제노아 돛 하나만 펼쳐도 2노트나 빨라진다. 요트와의 외형적 차이는 마스트 수와 배의 길이. 길이가 60피트(약 18.3m)를 넘고 마스트가 두 개 이상이면 범선으로 친다. 요트는 상위 1% 부자들이, 범선은 상위 0.01% 재력가들이 탄단다. 그래서, 대놓고 물어봤다.
![우리나라 유일의 범선인 코리아나호가 돛을 펴고 바다를 가르고 있다. [사진 정채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5/31/3295f22c-3da0-4716-9695-7f5b63dc3596.jpg)
우리나라 유일의 범선인 코리아나호가 돛을 펴고 바다를 가르고 있다. [사진 정채호]
코리아나호는 왜 당시 억류 중이었을까. 이 범선이 미국 마피아 두목 소유였다는 설이 있다. 정 선장에게 물어보자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라며 제노아 돛 같은 방어막을 폈다. 여하튼 그 ‘설’에 의하면 배가 대동조선소에 리노베이션을 위해 들어온 사이에 두목이 미국에서 체포됐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한국에 요청해 범선이 억류됐다.
정 선장은 “예나 지금이나 희한하게도 B클래스(전장 40m 미만, 코리아나호는 6m 늘임) 새 범선은 1000만 달러(약 137억원)로 고정돼 있다”며 “현재 코리아나호 시세는 235만 달러(약 32억원)”라고 했다. ‘제대로’ 샀다면 235만 달러와 1000만 달러 중간쯤의 가격이란 어림짐작만 할 뿐. ‘고가의 급매물로 나와 경쟁자도 없어 15억원에 싸게 샀다’는 설도 있다. 현재 1년 유지비는 1억6000만원 정도 든단다.

코리아나호 내부. 선실을 개조해 아카데미 교육실로 쓴다. 김홍준 기자
여천시장 당선돼 취임식과 겹친 진수식엔 '대타' 보내

수많은 공구는 코리아나호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김홍준 기자
"장보고·이순신 … 잠들어 있는 우리 해양 DNA 깨워야"
![코리아나호의 정채호 선장은 사비를 털어 1988년 5월 4일 전남 여수 선소(소호)에서 전라좌수영 복파정(장군도)까지 9.4km 구간의 전국한국노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한국 노가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사진 정채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5/31/e141bd21-6cdf-4279-a681-4acdcf3d1e8e.jpg)
코리아나호의 정채호 선장은 사비를 털어 1988년 5월 4일 전남 여수 선소(소호)에서 전라좌수영 복파정(장군도)까지 9.4km 구간의 전국한국노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한국 노가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사진 정채호]
코리아나호는 사도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모항인 여수 소호요트마리나로 돌아왔다. 학생들의 가슴이 꿈으로 한껏 부푼 듯했다. 딩기 요트 수십 척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40여 년 전 장 선장이 뿌린 씨앗이 이렇게 자랐구나 싶었다.
“닻 내리자!” 정 선장이 다시 외쳤다. 잭 스패로 아닌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그래요. 난 바다의 돈키호테입니다. 바다에 나무를 심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힘닿을 때까지 현역으로 당당히 바다를 누빌 겁니다.” 바다처럼 알 듯 모를 듯, 넓고 깊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