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개헌론
1987년 10월 12일 국회의사당, 이재형 당시 국회의장은 개헌안 통과를 선포한 후 이렇게 감격을 피력했다. 다만, 흥분을 가라앉힌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늙은이의 걱정”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개헌이 곧 민주화는 아니며 ‘좋은 헌법’에 정치인의 슬기, 국민적 양식과 협력이 플러스 되어야만 그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 전 의장의 ‘걱정’은 38년 뒤 현실이 됐다.
여소야대 구도서 대통령 3명 탄핵
2025년 연초부터 정치권은 개헌론 ‘백가쟁명(百家爭鳴)’이 펼쳐지고 있다. 4년 중임제에서 내각제까지, 조기 대선 이전부터 2032년 총선까지 방법과 시기도 가지각색이다. 여야 구분 없이, 헌정회장부터 초선 의원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개헌을 말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촉매제가 됐지만, ‘87년 헌법’을 손 봐야 한다는 움직임은 계엄 사태 이전부터 있었다. 지난 21대 국회 때 마련된 개헌특위가 대표적이다.
개헌의 핵심 대상은 5년 단임제다. 승자독식에 기반을 둔 5년 단임제가 “제왕적 대통령으로 시작해 식물 대통령으로 마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국정 운영 난맥상을 되풀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5년 단임제는 87년 개헌에서 ‘예상치 않은’ 결과물이었다. 당초 여권은 내각제를, 야권은 대통령 중임제를 선호했다. 양쪽 어디서도 내걸지 않은 5년 단임제로 귀결된 것은 개헌 당시 주요 플레이어였던 노태우·김영삼(YS)·김대중(DJ) 3자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최대공약수였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를 우려했던 여권은 야권 분열로 30%대만 득표해도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내각제를 거둬들였다. YS·DJ 측은 87년 대선 패배를 대비해 중임제를 내려놨다. 일종의 ‘보험’이었다. 중임제 대신 ‘6년 단임제’를 추진하자는 방안도 나왔지만, 양김 측이 거부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의 증언이다. 상대가 승리할 경우 다음 차례까지 너무 길어지는 것을 꺼려서였다. 결국, 세 사람 모두 대통령을 했다.
대통령의 행정권력과 다수당의 의회 권력이 충돌할 경우 해법이 마땅치 않은 약점은 오래지 않아 노출됐다. 87년 체제의 첫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대통령은 개헌 3년 만인 1990년 ‘정치적 안정과 국정 효율성’을 내세워 3당 합당을 추진했다. 대선을 이겼지만, 소수여당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도 “87년 체제의 문제는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보다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이 어긋났을 때 서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할 수 있는 ‘비토크라시’”라고 지적했다.
비토크라시의 폐해는 22대 국회에서 극에 달했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4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14차례에 걸쳐 33건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노태우 정부(7건), 노무현 정부(6건), 이명박 정부(1건), 박근혜 정부(2건)에 비하면 압도적 숫자다.
야당도 만만치 않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 5월 이후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29건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13건을 가결했다. 헌정 사상 탄핵 심판 사례 16건 중 81.3%에 해당한다. 이 중 한 건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다. 정대철 헌정회장은 “윤 대통령을 비롯해 의회가 탄핵시킨 노무현·박근혜 대통령 모두 여소야대 구도였다는 점은 현행 헌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5년 단임제를 대체할 대안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4년 중임제다. 대통령 임기를 4년씩 최대 두 차례로 늘리는 것으로 오세훈 서울시장, 유승민 국민의힘 전 의원,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 여야 주요 대선 후보군이 지지하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이쪽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선호도가 가장 높다. 정책의 연속성과 함께 재선 여부로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우상호 전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금은 대통령이 업무를 파악하는 데 1년이 걸리고, 이후 마음이 급해지니 힘으로 밀어붙이다가 고립되고 실패한다. 윤 대통령도 마찬가지”라며 “4년 중임제가 책임정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장기 집권을 막자고 어설프게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만들다 보니 여야가 5년간 죽어라 싸운다”고 했다. 승자 독식의 5년 단임제가 대통령에겐 제왕적 스타일을, 야당엔 ‘비토’의 유혹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반론도 있다. 김한규 민주당 의원은 “중임제도 재선 뒤엔 ‘다음’이 없기 때문에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국회의원 93% “개헌 필요하다”
그래서 대안으로 거론되는 게 대통령의 권한을 덜어내고 총리의 권한을 늘리는 것이다. 이른바 분권형 대통령제다. 유인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대통령 권한을 의회와 나누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바람직하다”고 했고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감사원장 등의 대통령 임명권을 제한하고, 책임총리제를 헌법에 명문화하자”는 의견을 냈다.
한때 유사한 형태의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최근엔 줄었다.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혼용이지만 대통령이 내각과 의회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이 제도를 두고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이원집정부제였으면 윤석열 대통령에 이재명 총리 체제다. 나라가 운영되겠나”라고 반문했다.
●5년 대통령 단임제: 1987년 개헌으로 탄생한 현 6공화국의 권력구조다. 흔히 ‘87체제’라고도 한다. 초기보다 대통령 권한에 대한 국회의 통제가 강화되는 쪽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적 속성이 여전한 가운데, 여소야대에서 대통령·야당과의 충돌이 국정 마비로 이어지는 문제를 드러내왔다. 최근 비상계엄·연속탄핵은 극단적 사례다. 5공화국 때는 7년 단임제(간접선거)였다.
●4년 대통령 중임제: 미국이 대표적인 4년 중임제 국가다. 다만 우리에 비해 대통령의 권한 자체는 제한적이다. 우리와 달리 예산안 편성권이 의회에 있는 게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종종 정부 셧다운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선심성 정책을 펴는 경향이 있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분권형 대통령제: 대통령이 외교안보를 책임지고, 총리는 내치를 맡는 절충안이다. 일반 유권자 대상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의 임기 보장으로 안정성을 획득하면서도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이원집정부제의 프랑스가 대표적인데, 과반 정당(또는 정당연합)의 대표가 총리가 된다. 대통령과 총리 간 소속 정당이 다를 경우 ‘동거정부’라 하는데, 둘 사이 갈등이 심하면 국정 마비로 이어지곤 한다.
●의원내각제: 과반 정당(또는 정당연합)의 대표가 총리를 맡아 내각을 구성한다. 세계적으로 보면 대통령제보다 더 일반적 형태의 권력구조다.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이 일치하기 때문에 국정 전반의 집행력이 높아질 수 있다. 책임정치 면에서도 낫다는 평가다. 성공적 정부의 경우 장기 집권도 가능해 마거릿 대처의 경우 12년 간 영국 총리로 있었다. 반면 집권당의 인기가 추락하면 정부도 불안정해진다. 2022년에만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등 3명의 영국 총리가 등장했다. 4·19혁명 이후 출범한 2공화국도 의원내각제였는데, 당시 정국이 혼란했었다.
●소선거구제·중대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으면 소선거구제, 2명 이상을 뽑으면 중대선거구제라고 한다. 현행 방식은 소선거구제다. 소선거구제의 경우 최다득표자만 당선되기 때문에 사표 방지 심리가 상대적으로 더 작동, 양당제를 만들어내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5.5%포인트 더 얻었지만 의석은 71석을 더 가져간 배경이다. 중대선거구제는 이와 달리 다당제를 만들어내는 경향성이 있다고 돼 있다. 이 때문에 양당제 폐해 극복을 위해 중대선거구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강하다.
●4년 대통령 중임제: 미국이 대표적인 4년 중임제 국가다. 다만 우리에 비해 대통령의 권한 자체는 제한적이다. 우리와 달리 예산안 편성권이 의회에 있는 게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종종 정부 셧다운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선심성 정책을 펴는 경향이 있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분권형 대통령제: 대통령이 외교안보를 책임지고, 총리는 내치를 맡는 절충안이다. 일반 유권자 대상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의 임기 보장으로 안정성을 획득하면서도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이원집정부제의 프랑스가 대표적인데, 과반 정당(또는 정당연합)의 대표가 총리가 된다. 대통령과 총리 간 소속 정당이 다를 경우 ‘동거정부’라 하는데, 둘 사이 갈등이 심하면 국정 마비로 이어지곤 한다.
●의원내각제: 과반 정당(또는 정당연합)의 대표가 총리를 맡아 내각을 구성한다. 세계적으로 보면 대통령제보다 더 일반적 형태의 권력구조다.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이 일치하기 때문에 국정 전반의 집행력이 높아질 수 있다. 책임정치 면에서도 낫다는 평가다. 성공적 정부의 경우 장기 집권도 가능해 마거릿 대처의 경우 12년 간 영국 총리로 있었다. 반면 집권당의 인기가 추락하면 정부도 불안정해진다. 2022년에만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등 3명의 영국 총리가 등장했다. 4·19혁명 이후 출범한 2공화국도 의원내각제였는데, 당시 정국이 혼란했었다.
●소선거구제·중대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으면 소선거구제, 2명 이상을 뽑으면 중대선거구제라고 한다. 현행 방식은 소선거구제다. 소선거구제의 경우 최다득표자만 당선되기 때문에 사표 방지 심리가 상대적으로 더 작동, 양당제를 만들어내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5.5%포인트 더 얻었지만 의석은 71석을 더 가져간 배경이다. 중대선거구제는 이와 달리 다당제를 만들어내는 경향성이 있다고 돼 있다. 이 때문에 양당제 폐해 극복을 위해 중대선거구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강하다.
내각제로 바꾸자는 목소리도 있다. 김종필(JP) 전 총리가 대표적 내각제론자다. 2019년 나경원 의원이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시절 “내각제에 가까운 원포인트 권력구조 개헌”을 제안한 일이 있다. 황우여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국민에게 신임을 받은 정당이 정치를 해야 한다”며 독일식 내각제를 제안했다. 일반적 내각제와 달리, 후임 총리를 내정해야 내각 불신임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개헌의 필요성은 이견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2021년 7월, 국회 국민통합위원회와 SBS가 국회의원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93.3%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개헌 가능선(재적 3분의 2, 67%)을 넘는 수준이다. 문제는 디테일인데 그 중엔 동력도 있다. 87년 개헌은 속도전이었다.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 후 넉 달 만인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93.1%의 지지를 얻어 완성됐다. 유력 대선주자 노태우·YS·DJ 3자의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가능했다.
현재는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1위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소극적이라는 점이 걸림돌이다. 친명계 좌장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개헌론을 “뜬금없다”고 일축했다. 개헌의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대선 이후로 논의를 미루자는 것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이와 관련, “현재 개헌의 주체가 없기 때문에 개헌이 쉽게 이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면서도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은 임기 내에 개헌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권력구조 개편보다 선거구제부터 바꾸자는 목소리도 있다. 안철수 의원은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극단적인 양당제에 가장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합리적인 중도 정당 지지는 모두 사표(死票)로 전락한다”며 “중대선거구제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다당제가 가능해지면, 정치가 바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인태 전 수석도 “민주당이 너무하다는 얘기가 많은데,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 득표율로 5.5%포인트 이기고도 71석을 더 가져간 결과”라며 “다당제를 구현할 선거제 변경이 필요하다. 의회가 가장 빛났던 시기도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4당 체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중대선거구제 전환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박성민 민 대표는 “중선거구제로 바꿔 다당제를 거치면서 내각제로 가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고, 비례를 늘려 지역색 띄는 의원들 줄여 3·4·5당을 만들어야 현재의 극단적 갈등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